신라사연재글

2006년 소년한국일보연재 29회 - 신라 민정문서

영양대왕 2006. 10. 1. 23:21
촌락의 모습과 농민 생활
재산·인구·나이·가축·유실수까지 관리
공정하게 세금 거두며 백성 다스려


신라 민정문서. 가로 58 ㎝ㆍ세로 29.6 ㎝ 크기의 닥나무 종이로 만들어졌다.

신라인의 대다수인 농민들은 어떻게 살았으며 나라에서는 이들을 어떻게 관리했을까요? 하나의 국가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공공 시설을 건설하거나 군대를 유지하는 비용도 필요합니다. 따라서 농민도 세금을 내야 했습니다.

그런데 세금은 아무런 기준 없이 거둘 수 없었습니다. 즉 백성들 모두가 불만을 갖지 않을 만큼 공정한 기준을 정해야 했습니다.

신라 민정문서에 촌락 상황 자세히 기록

신라 시대에는 그 기준을 각 가정의 재산ㆍ인구ㆍ나이 등으로 정했습니다.

하지만 '삼국사기'는 임금과 신하 위주의 기록이라 농민들의 생활 모습을 제대로 알기에는 부족한 점이 많습니다.

그런데 통일 후 농촌의 생활과 세금 및 행정 제도가 어떠했는지를 알려 주는 귀중한 자료 2 장이 1933년 일본의 사찰인 동대사의 창고인 정창원에서 불경을 수리하던 중에 발견되었습니다.

이를 '신라민정문서'(신라 장적)라고 하는데, 서원경(청주) 부근 4 개 촌락의 상황이 자세히 기록돼 있습니다. 이는 신라의 지방 행정 기관에서 만들어진 공문서입니다. 제작 연대는 정확하지 않지만 대략 815년±60년으로 신라가 통일 후 경제적 안정을 누린 시기로 역사학자들은 추측하고 있습니다.

문서에 적힌 각 촌락에는 72 명~147 명 정도씩 모두 462 명(혹은 442 명)이 살았습니다. 한 마을에 115 명쯤 살았던 셈입니다.

문서에는 나이별로 정ㆍ조자ㆍ추자ㆍ소자ㆍ제공ㆍ노공 등 6 등급으로 인구를 조사해 두고 있습니다. 특히 15~57 세까지의 '정'은 각종 노역과 세금의 대상자였습니다. 이 중 남자들은 군대에 가야하므로 나라에서 이들의 숫자를 정확히 파악하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4 개 촌락에 젊은 남자는 99 명으로 전체의 20 %에 불과합니다.

반면 젊은 여자는 143 명으로 남자보다 44 명이 많습니다. 여자가 많은 것은 남자들이 전쟁으로 인한 사망 또는 출생률의 차이로 보고 있습니다.

농민이 주축으로 생업 종사

경북 칠곡군 동천동에서 발견된 신라인들이 신던 짚신.

촌락에는 노비가 25 명으로 전체의 5 %입니다. 수도 금성에는 귀족들이 소유한 노비가 많았겠지만, 신라 전체적으로는 노비가 많은 건 아니었습니다. 농산물을 생산하는 중심은 노비가 아닌 농민들이었던 것입니다.

촌락에는 내시령답ㆍ관모답이라고 하여 농민들이 아닌 관청과 귀족ㆍ촌주가 소유한 땅도 있습니다. 이 촌락에는 논과 밭 외에 삼베밭도 있었는데, 삼베밭을 따로 관리했다는 것은 농민들이 삼베를 많이 재배했음을 알려 줍니다.

4 개 마을에는 소 53 마리ㆍ말 61 마리ㆍ뽕나무 4249 그루를 비롯해 잣나무ㆍ호두나무 등 유실수까지도 정확하게 기록돼 있습니다. 농민들은 한 집에 소 1 마리ㆍ말 1.5 마리를 키우며 이들을 이용해 농사를 지었습니다.

말은 군용으로도 사용돼 나라에서 많은 관심을 갖고 관리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농민들은 논과 밭의 생산물뿐만 아니라, 유실수에서 나오는 것에 대해서도 일정 부분 세금을 내야 했습니다.

신라는 농민들을 6 등급으로 나눈 것 외에도 토지를 9 등급으로 나누어 생산량이 많은 땅과 그렇지 않은 땅을 구별하여 각기 세금을 다르게 거두었습니다. 또 문서에는 다른 촌락으로 옮기거나 도망간 사람이 48 명이나 되는 것으로 나타나는데, 이 역시 나라에서 철저히 백성을 관리했다는 증거입니다.

한편 신라 민정문서는 3 년마다 변동 상황을 적어 관청에 보고되었습니다. 당시는 농민들이 다른 마을로 이사를 가려면 관청의 허가를 받아야 했습니다.

4 개 촌락의 넓이는 각각 지름이 3~7 ㎞에 이릅니다. 이웃 마을까지는 대략 6 ㎞ 떨어져 있습니다. 촌락에 임야가 포함돼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촌락끼리의 간격이 꽤 넓습니다.

따라서 다른 촌락의 사람들을 만나기는 무척 어려웠을 것입니다. 이처럼 민정문서를 보면 소와 함께 농사를 짓고, 유실수에서 과일을 따고, 삼베옷을 만들어 입고, 세금을 내면서 촌락 내의 이웃들과 정겹게 살아가는 신라 농민들의 생활이 눈앞에 보이는 듯 합니다.


<김용만 우리역사문화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