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사연재글

2006년 소년한국일보연재 23회 - 통일후 수도 경주의 번영

영양대왕 2006. 8. 22. 17:43
통일 후에도 번영의 꽃 '활짝'
수도 '경주'

삼국 통일 후 5 대 왕조에 걸쳐 태평성대 맞아

삼국 통일 후 신라의 번영을 보여 주는 사례가 삼국유사에 실려 있습니다.

“682년 신문왕은 동해에 홀연히 나타난 작은 산에서 낮엔 갈라져 둘이 되고 밤에는 합하여 하나가 되는 신기한 대나무를 얻었습니다. 왕은 대나무로 피리를 만들었는데, 이를 ‘만파식적’이라고 불렀습니다.

이 피리를 불면 적병이 물러가고, 병이 나으며, 가뭄에는 비가 오고, 바람이 멎고 물결이 가라앉는 놀라운 효과가 있었습니다. 만파식적은 문무대왕과 김유신이 선물로 준 것이라며, 신문왕은 이를 나라의 보물로 삼아 잘 간직해 두었습니다.”

이 이야기를 사실 그대로 믿을 수는 없겠지만, 통일 후 신라에 근심 걱정이 사라지고 평화가 찾아왔음을 보여 줍니다. 신라는 31대 신문왕부터 효소왕ㆍ성덕왕ㆍ효성왕ㆍ경문왕(742년∼765년)에 이르기까지 5 대에 걸쳐 평화와 번영의 시대를 누렸습니다. 인구와 땅은 크게 늘어났으며, 전쟁과 내부 갈등은 줄어들었습니다.

미추왕릉지구 독무덤에서 나온 높이 13 cm 크기의 수레 모양 토기. 신라에 잘 발달된 도로 위를 이런 수레들이 맘껏 다녔을 것으로 보인다.

신문왕은 689년 신라를 더 잘 다스리기 위해 달구벌(대구)로 수도를 옮기려 했습니다. 통일 후 수도 금성에 인구가 너무 많아졌기 때문이었습니다. 또 나라가 커진 만큼 정부 기관이 늘고 수도를 방어할 군인도 많아졌습니다.

그런데 금성은 이러한 ‘대신라’의 중앙이 아니라, 동남쪽으로 많이 치우쳐 있었습니다. 그래서 좀더 가운데, 넓은 면적을 지닌 장소로 수도를 옮기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수도를 옮기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습니다.

수도 이전 대신 도로와 작은 수도 만들어

신라는 당시 수도와 지방에 사는 사람들을 크게 차별했습니다.

그런데다 진골 귀족들은 집을 옮기는 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결국 수도 이전 계획은 실행되지 못했습니다.

그 대신 수도를 잘 정비된 계획 도시로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남산 북쪽에 있는 월성에서 북쪽으로 북궁을 연결하는 주작대로를 수도의 중심 도로로 삼아 가로ㆍ세로 구획에 맞춰 큰 도로와 작은 도로를 직선으로 만들었습니다.

경주국립박물관 터에서는 남북 방향으로 너비 23 m, 동서 방향으로 15∼16 m의 신라 시대 도로 유적이 발견된 바 있었습니다. 즉 큰 도로 사이에 작은 길을 내고 길과 길 사이에 집을 지어 바둑판처럼 도시를 만들었던 것입니다.

금성은 크게 왕도와 6부로 나누어졌는데, 왕도는 길이 3018 보(약 5.4 ㎞), 넓이 3075 보(약 5.5 ㎞)의 크기에 35 개 리가 있었습니다. 왕도 지역은 지금의 경주 시내 중심지입니다.

6부 지역은 그 바깥으로, 왕경과 6부를 포함한 금성에는 대신라의 전성기에 17만 8938 호의 인구와 1360 방 55 리가 있었다고 합니다. ‘방’과 ‘리’는 요즘의 구ㆍ면ㆍ동ㆍ리와 같은 행정 구역을 말합니다. ‘호’는 집입니다.

한 집에 4~ 5 명이 살았다고 보면, 당시 금성에는 70만~90만 명에 이르는 엄청난 숫자가 됩니다. 일부 학자들은 인구가 너무 많아 기록을 의심하기도 합니다.

경주박물관 터에서 발견된 신라 시대 도로 유적. 23 m 넓이로, 남북으로 났다.

그렇다고 해도 같은 시기 전세계에 이처럼 큰 도시는 당나라의 수도인 장안 정도를 제외하고는 드뭅니다. 수도 금성에는 또한 궁궐과 수도의 행정을 맡은 경성주작전을 비롯해, 황룡사와 분황사 등 거대한 사찰, 여러 왕과 귀족의 무덤이 있었습니다. 동시ㆍ서시 등의 거대한 시장에도 물건들이 넘쳐났습니다.

최근 대구 봉무동 유적에서는 길이 143 mㆍ너비 3∼5 m가량의 아스팔트처럼 단단한 신라의 도로가 발견됐습니다. 수레와 말이 이 도로를 달려, 수도에서 내린 명령이 지방으로 빠르게 전달되도록 했던 것입니다.

대신라는 또한 지방에 북원경(원주)ㆍ중원경(충주)ㆍ서원경(청주)ㆍ남원경(남원)ㆍ금관경(김해) 등 5 개의 작은 수도를 건설했습니다. 즉 금성이 너무 한쪽에 치우친 단점을 도로와 작은 수도 건설로 보완했던 것입니다.

덕분에 금성은 신라 천년의 수도로서 화려한 번영의 꽃을 활짝 피웠습니다.


김용만(우리역사문화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