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사연재글

2006년 소년한국일보연재 31회 - 혜초 스님.

영양대왕 2006. 10. 15. 16:08
진리 탐구 위해 먼 길 떠난 스님들
인도·중국 등에 기록 남겨

●해초의 왕오천축국전

불교의 나라 신라에는 황룡사ㆍ불국사 등 유명 사찰은 물론 원효ㆍ의상과 같은 큰 스님도 많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소개할 혜초는 색다른 분입니다.

그는 704년 신라에서 태어나 16 세에 불교 공부를 위해 당나라에 건너갑니다. 이후 지금의 광주(홍콩 옆)에서 평생의 스승인 인도 출신의 금강지 스님을 만납니다. 혜초는 그와의 만남을 통해 인도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20 세가 되던 해에는 광주에서 바다를 통해 동남 아시아를 거쳐 인도 동부의 갠지즈 강 주변에 있는 마가다 국으로 갔습니다. 혜초는 그 곳에서 부처가 열반한 쿠시나국과 부처님이 처음 설법한 녹야원 등을 방문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지금의 아프가니스탄 지역은 물론 페르시아라고 불렸던 지금의 이란 지역까지 여행합니다. 그는 중앙 아시아의 힌두쿠시 산맥을 넘고, 중국의 감숙성 돈황을 지나 당나라 수도인 장안으로 돌아왔습니다. 무려 4 년 동안 인도와 중앙 아시아를 돌며 수행한 셈입니다.

이처럼 대단한 여행을 한 혜초라는 인물은 오랜 동안 잊혀져 왔습니다.

그런데 1908년 프랑스 인인 펠리오가 중국 감숙성 돈황 석굴에서 혜초가 쓴‘왕오천축국전’을 발견함으로써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이 책은 지금까지 남아 있는 우리 조상들의 것 가운데 가장 오래된 책이라고 할 만큼 귀한 것입니다.

비록 책 전체가 남아 있지는 않지만, 그 내용에는 대단히 중요한 것들이 기록돼 있습니다. 혜초는 여행을 하면서 인도와 중앙 아시아의 각 지방에 관한 지명과 국명ㆍ왕의 이름ㆍ언어와 풍속ㆍ정치 등을 기록해 둔 것입니다.

8세기 무렵 이 지역의 상황을 알 수 있는 자료 중 왕오천축국전만한 책을 찾기 어려울 만큼 그가 여행을 하면서 남긴 기록은 중요한 가치가 있습니다.

돈황 석굴 천불동. 이 곳 천불동 17 굴에서 왕오천축국전이 발견되었다.

인도 각 나라 왕의 코끼리와 병력이 얼마이며, 이슬람 세력이 얼마만큼 인도쪽으로 침입해 왔는지, 돌궐ㆍ티베트 등의 영향력이 중앙 아시아에 어디까지 미쳤는지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당시 인도의 사회와 불교계의 움직임, 각 지방의 음식ㆍ의복ㆍ풍습ㆍ산물과 기후에 관한 내용도 살필 수 있습니다.

이처럼 귀한 기록을 남긴 혜초 스님은 ‘먼 곳까지 여행한 위대한 신라인’이라는 높은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혜초는 당나라에서 머물며 그 곳의 불교를 발전시키다 780년 세상을 떠났습니다. 따라서 신라의 불교 발전에 기여한 바도 없고, 또 신라에 그가 남긴 기록이 전해지지도 않았기 때문에 오래도록 우리 역사에서 잊혀져 왔던 것입니다.

●겸익·현각·혜업 등 해외 수행 나서

혜초는 남인도를 여행하던 도중 “내 나라는 하늘가 북쪽에 있고 남의 나라는 땅끝 서쪽에 있네. 일남에는 기러기마저 없으니 누가 소식 전하러 계림으로 날아가리.”라는 시를 시어 고국 신라에 대한 그리움을 표현했습니다.

이처럼 혜초는 분명 신라인이었고, 당나라에서도 신라인으로 알려졌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주목할 것은 혜초처럼 신라를 떠나 중국이나 인도 등으로 여행을 한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다는 점입니다.

그 중 이름난 이가 겸익 스님입니다. 그는 혜초보다 200 년 앞선 526년 인도로 건너가서 불교를 연구한 뒤 530년 인도 승려와 함께 산스크리어트 어로 된 불교 경전을 가져옵니다. 또 흥륜사에서 28 명의 승려와 72 권을 번역, 백제 불교 발전에 큰 공을 세웁니다. 신라에서도 많은 스님들이 인도로 불교를 연구하러 갔습니다. 그 중 현각ㆍ혜업ㆍ아리야발마 스님 등은 인도의 불교 대학인 날란다 사원에서 생애를 마칩니다.

이처럼 당시 신라인들은 불교의 진리를 찾아 중국은 물론, 먼 인도까지 배를 타고 긴 여행을 한 진정한 진리 탐구를 위해 노력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김용만 우리역사문화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