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사연재글

2006년 소년한국일보연재 - 신문왕의 군사,교육 정책

영양대왕 2006. 9. 10. 16:16
신문왕, 평화 속 참된 번영 이루다
당 침략 야욕에 맞서며 인재 기르고 국력 다져

신문왕은 문무 대왕의 장남으로, 681년 왕의 자리에 오릅니다. 그 뒤 692년까지 12 년간 나라를 다스립니다. 676년에 신라가 당나라를 몰아 내고 삼국 통일을 이뤘으므로 신문왕 시기에는 겉으로는 전쟁이 없는 평화로운 시대였습니다.

그러나 평화는 쉽게 얻어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랜만에 얻은 평화를 스스로 지켜 내기 위해 수많은 노력을 기울였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9서당 부대 완성-군사력 강화

676년 당나라가 기벌포 전투 등에서 패해 신라에 대한 공격을 포기했지만, 전쟁이 완전히 끝난 건 아니었습니다. 당시 당나라는 티베트와 치열한 전쟁을 치르고 있었으므로 곧장 신라를 반격할 수 없었을 뿐이었습니다.

경주시 배반동에 자리한 무덤. 신문왕릉으로 알려져 있다.

678년 당 고종은 장차 군대를 보내 신라를 토벌하고 싶다는 의지를 내보이고 있었습니다. 신문왕은 이 같은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당 고종은 신라로 사신을 보내 과거 당 황제 이름에 ‘태종’이라는 호칭이 있는데, 신라에도 ‘태종’이 있으니 이를 고치라고 요구해 왔습니다.

태종이라는 호칭은 본래 큰 업적을 남긴 임금에게만 붙이는 것이었습니다.

신문왕은 그러나 자신의 할아버지인 태종 무열왕 김춘추가 당나라 태종 이세민에 비해 결코 모자라지 않다고 주장했습니다.

“신라는 비록 작은 나라지만 성스러운 신하 김유신을 얻어 삼국을 통일했으므로 태종이라고 한 것이다.

신문왕은 그러나 신라가 전쟁에서 승리했지만, 당나라가 전력을 다하지 않은 상태에서 거둔 것임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당시 당나라는 세계에서 가장 큰 나라이자 문화와 경제 등 모든 면에서 최강이었습니다. 신문왕은 그런 당나라에게 얕잡아 보여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 이렇게 주장했으며, 결국 당나라는 이 문제로 다시 시비를 걸지 못했습니다.

신문왕이 왕위에 오른 첫해 김유신의 조카 김흠돌이 반란을 일으킨 적이 있었습니다. 신문왕은 이후 신라를 하나로 뭉치게 할 필요성을 느꼈습니다.

신문왕은 683년 황금서당과 흑금서당을 창설하는 것을 시작으로, 벽금서당ㆍ적금서당 등 5 개의 부대를 만들어 기존의 부대와 합쳐 9 서당이라는 부대를 완성했습니다. 그 중 황금서당은 옛 고구려 유민으로, 흑금서당은 말갈인으로, 청금서당은 백제인으로 구성된 부대였습니다.

신문왕은 이처럼 새로 통합한 백제ㆍ고구려인을 완전한 신라인으로 만드는 정책을 펼치면서 군사력을 더욱 강화했던 것입니다.

신문왕은 또 3 곳의 변방을 지키는 부대와 적금무당ㆍ황금무당도 새로 만들었습니다. 즉 강한 군대를 둠으로써 당의 침략 야욕을 억제했던 것입니다.

●국학 세워 유교 경전 가르쳐

신라의 국학이 있던 자리에 세워진 경주 향교.

이즈음 신라에 대한 당의 침략 야욕을 반감시키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바로 698년 발해의 건국이었습니다. 발해의 건국으로 당나라는 육지로 신라를 공격치 못하게 됐습니다.

신문왕은 군사력뿐만 아니라, 인재를 키우는 데도 애썼습니다.

왕이 된 이듬해 위화부령 2 명을 둬 관리를 추천하고 뽑는 일을 맡겼고, 국학을 설립해 유능한 인재를 길러 냈습니다.

국학에서는 주역ㆍ상서ㆍ예기 등 유교의 경전 등을 가르쳤습니다.

나라를 잘 다스리기 위해서는 유교의 가치관인 충ㆍ효에 충실하고, 한문 문장에도 익숙한 사람이 필요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처럼 신문왕이 인재를 기르고, 제도를 정비하여 국력을 다지고, 군사를 길러 전쟁을 억지함으로써 신라는 비로소 평화 속에 참된 번영을 누릴 수 있게 됐습니다.

<김용만 우리역사문화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