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사연재글

소년한국일보연재 27회 - 신라와 발해의 관계

영양대왕 2006. 9. 18. 09:40
 발해와 교류하며 평화로운 관계 유지


8세기 신라와 발해의 관계를 나타내는 지도.

676년 신라는 당을 몰아 낸 이후 오랜 기간 외교 관계를 맺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당나라의 침략을 대비해 꾸준히 군대를 늘려갔습니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당나라와 다툴 수만은 없었습니다. 당시 세계에서 가장 부강한 나라이자 문화와 제도 또한 가장 발달한 국가였기 때문입니다. 돌궐과 토번 정도만이 군사력에서 당과 비교할 수 있는 수준이었습니다.

따라서 신라는 좋든 싫든 당나라와 교류하는 게 이익이 컸습니다. 당과 교역해야 동남아시아의 여러 나라 및 아라비아와도 거래할 수 있고, 또 중계 무역을 통해 일본에게 물건을 되팔아 이익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실상 698년 발해의 건국 후 당과 신라는 서로 전쟁을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두 나라 사이에 발해가 끼여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때문에 당나라 역시 신라와 평화로운 관계를 맺는 것이 유리했습니다.

발달한 당의 문화·제도 배워

서기 700년이 지나면서 신라는 당나라에 사신을 자주 보냈습니다. 신라는 이후 당나라에 말ㆍ인삼ㆍ우황ㆍ금ㆍ실크 등을 수출하게 되었습니다. 또 당의 교육 기관인 국학에 학생들을 보내 학문을 배우도록 했습니다. 그래서 두 나라가 가까워지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두 나라의 관계가 결정적으로 좋아지게 된 사건이 일어납니다.

732년 발해가 장문휴 장군을 보내 바다 건너 당나라의 등주(산동반도 북쪽 해안가)를 공격한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발해는 육로로는 요하를 건너 요서의 마도산 지역까지 공격했습니다. 하지만 당나라는 정치가 어지러워 국력을 한 곳에 모으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발해의 공격을 막기가 어려웠지요. 이러한 상황에서 당나라는 신라에게 구원군을 요청했습니다.

신라는 발해와 당 사이에서 선택을 해야 했습니다. 결국 733년 신라는 발해의 남부 지방을 공격, 발해가 당에 대한 침략을 멈추게 합니다.

당시 신라가 발해를 공격한 걸 두고 두 나라의 사이가 나빴다고 여기기 쉽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당시 신라는 발해보다 당나라와의 교역이 더 중요했기 때문에 당나라를 도왔던 것입니다. 하지만 발해와도 더 이상 큰 전쟁을 치르지 않아 두 나라의 관계도 크게 나빠지지 않았습니다.

발해의 24 괘석. 발해 건물의 주춧돌이다.

탄항관문 만들고 국경 오가며 교역

발해에는 수도인 상경성을 중심으로 전국에 5 개의 주요 도로가 있었습니다.거란, 일본, 당의 영주와 등주, 그리고 신라로 연결되는 도로였습니다. 신라와의 연결 도로가 있다는 건 두 나라의 교류가 활발했음을 말해 줍니다.

이 길과 연결된 곳으로서 발해의 다섯 수도 중 하나인 남경남해부가 있었습니다. 함경도 동해안을 따라 이루어진 이 도로변에는 3 개의 ‘24 괘석’ 유적이 남아 있습니다. 이 유적은 발해만의 독특한 건물의 주춧돌입니다. 창고 또는 교통과 관련된 관청의 건물이 있었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당시 신라와 발해의 국경은 서해안의 대동강 입구에서 동해안의 니하(원산만 주변 용흥강)에 이르는 대략 북위 39 도에 해당됩니다. 신라는 750년대 탄항관문을 만들어 발해와의 교역을 관리하기도 합니다. 이처럼 두 나라는 서로 국경을 오가며 교류했던 것입니다.

발해 역시 당나라와 교류하고 있었습니다. 신라와 발해가 당과 교류를 하게 되자, 당나라는 ‘이이제이(오랑캐가 오랑캐를 물리침)’ 전략으로 발해와 신라를 이간질시켜 서로 경쟁토록 했습니다.

언뜻 생각하기에 고구려를 계승한 발해는 신라가 고구려를 멸망시킨 적으로, 신라는 발해를 북쪽의 경쟁자로서 서로 으르렁거렸을 것이라 여기기 쉽지만 실제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두 나라의 전쟁은 733년 한 차례를 빼고는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