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사연재글

2006년 소년한국일보연재 22 - 삼국통일을 이룩하다.

영양대왕 2006. 8. 22. 17:42
[신라 1000년의 비밀] 마침내 '삼국통일' 이뤄 내다


당을 몰아 내기 위해 한마음으로 당과 맞서 싸워

백제에 이어 668년 고구려를 멸망시킨 신라에게 과연 평화가 찾아왔을까요? 신라마저 속국으로 삼으려는 당나라의 욕심에 계속해서 긴장해야만 했습니다.

문무왕은 고구려 유민들의 투쟁을 막으면서, 한편으로는 이들을 달래어 신라편으로 만들었습니다. 대표적인 이가 고구려 보장왕의 서자인 안승입니다.

문무왕은 그에게 김제 땅을 주고 보덕국왕으로 임명합니다.

한편 669년에는 당나라가 동원한 말갈ㆍ거란과 전쟁을 치르면서 서서히 당과 싸울 준비를 합니다. 드디어 671년, 신라군은 석성에서 당군 5300 명을 죽이는 승리를 거두게 됩니다. 당나라는 이 전쟁에서 패하자 사신을 보내 신라를 비난합니다. 그러자 문무왕도 사신을 보내 당나라에 잘못을 따졌습니다.

문무왕의 시신을 화장한 곳으로 알려진 능지탑.

"과거 두 나라의 동맹 때 약속이 있었다. 고구려와 백제 멸망 후에는 고구려 평양 남쪽과 백제 땅을 신라가 갖는 것이다. 이를 어긴 건 당나라다."

하지만 당나라는 애초 약속을 지킬 생각이 없었습니다. 마침내 그 해 9월 4 만의 군대로 신라를 공격해 왔습니다. 신라는 즉시 반격에 나서 승리했습니다.

신라는 당나라를 달래는 한편으로 단호하게 맞서 싸웠습니다.

이와 함께 백제 옛 땅에서 당군을 몰아 내는 데에도 힘을 기울였습니다. 이에 672년 당나라는 4만 명의 군대를 다시 동원해 공격해 왔습니다.

신라는 고구려 유민들과 백수성에서 전투를 벌여 당을 크게 물리쳤습니다.

그런데 673년 7월, 문무왕이 의지하던 김유신 장군이 노환으로 숨지고 맙니다. 또 아찬 벼슬을 하던 대토가 당나라에 붙어 신라를 배신함에 따라 위기가 겹칩니다. 문무왕은 이 위기를 슬기롭게 극복하고 다시 당나라와 전쟁을 시작합니다.

당시 당나라는 고구려와의 전쟁으로 국력이 약해졌으며, 때마침 토번(티베트)의 공격을 받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신라에 많은 군대를 보낼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문무왕은 이를 정확히 알고 당나라에 맞섰던 것입니다.

이에 질세라 당나라도 말갈ㆍ거란 병사들을 보내 반격해 왔습니다.

그러나 정예군이 아닌 이들은 신라의 상대가 되지 못했습니다. 신라군은 호로하ㆍ왕봉 두 강에서 적군을 물리쳤습니다. 신라는 전쟁을 치르면서 당나라에 저항하는 고구려인을 계속 받아들였고 백제 옛 땅도 차지해 지켰습니다.

죽어서도 신라의 평화와 안녕 바란 문무왕

그렇게 되자 당나라는 단단히 화가 났습니다. 675년에는 20만 대군을 동원해 공격했습니다. 이 때 신라군은 매초성ㆍ칠중성 전투 등 18 차례의 전투에서 모두 이겼습니다.

이견대에서 본 문무왕 수증릉.

또 676년 11월 기벌포에서 벌어진 당나라와의 22 회에 걸친 전투에서도 적 4000여 명을 죽이는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거듭된 전쟁에 지친 당나라는 더 이상 신라와 전쟁을 치를 수 없는 상황에 놓이게 됐습니다.

마침내 신라는 당나라를 몰아 내고 삼국통일의 큰 업적을 이뤄 냈습니다.

신라가 당나라를 몰아 낼 수 있었던 것은 한 마음이 돼 나라를 위해 싸운 군사들, 그리고 국제 정세를 정확히 파악하고 나아감과 물러섬을 아는 판단력을 지닌 문무왕이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한편 문무왕은 681년 삼국통일을 완수한 뒤 눈을 감습니다. 하지만 죽는 순간까지도 신라의 평화와 안녕을 걱정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시신을 화장한 뒤 뼛가루를 동해 대왕암 위에 뿌리라고 유언했습니다. 신라인들은 문무왕이 죽어 나라를 지키는 용이 되었다고 믿었습니다. 문무왕은 신라인의 존경을 한 몸에 받은 진정한 신라의 수호신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