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사연재글

2006년 소년한국일보연재 21회 - 문무왕

영양대왕 2006. 8. 9. 00:32
문무왕의 의지와 계획으로 삼국 통일 '눈앞'


●백제를 차지하기 위해 당나라 도와

백제를 멸망시킨 신라는 승리의 기쁨을 누리고 싶었지만, 마냥 즐거워할 처지가 아니었습니다. 백제의 멸망은 신라에게 또 다른 위기의 시작이었습니다.

신라는 백제를 부흥시키려는 유민들과 끊임없이 전쟁을 치러야 했습니다. 또한 고구려와 왜국의 공격도 힘겹게 막아 내야 했습니다. 그러나 신라를 가장 괴롭힌 나라는 바로 동맹국인 당나라였습니다.

평양의 고구려 장안성. 신라군은 대동강을 건너기 위해 이 성을 공격했다.

648년 김춘추와 당나라 이세민이 맺은 협약에 따르면, 두 나라는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후 대동강 남쪽 땅을 신라가 갖기로 했습니다. 하지만 당나라는 약속을 지키지 않고 신라를 이용하려고만 했습니다.

660년 7월 18일 백제를 멸망시킨 당나라 13만 대군은 2 달도 채 안 된 9월 3일 당나라로 되돌아갑니다. 고구려와의 전쟁을 준비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이 때 당나라는 백제 의자왕과 신하 그리고 포로 1만 2000 명을 함께 데리고 갔습니다. 더욱이 당은 1만의 군대를 사비성에 주둔시켜 놓았습니다.

반면 신라는 백제 부흥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여 곳곳에서 승리를 거뒀습니다. 특히 663년에는 백강 어귀에서 백제 부흥군과 왜의 병선 400 척을 격파했으며, 마지막 보루였던 임존성의 부흥군도 그 해 11월 모두 제압했습니다.

신라는 또 662년에는 고구려를 공격하던 당나라 군대에게 많은 식량을 가져다 주는 한편, 사비성에 머물고 있는 당나라 군대를 보호해 주고 식량과 의복을 공급해 주는 궂은 일까지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신라가 이렇듯 당을 도운 것은 오직 백제 지역을 차지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문무왕, 고구려 공격 중에도 당과의 전쟁 대비해 힘 비축

삼국 통일을 이룬 문무왕. 사진은 경주 통일전에 전시된 문무왕의 상상도.

당나라는 그러나 백제 땅에 웅진 도독부를 두고, 백제의 왕자 부여융을 도독으로 앉혔습니다. 겉으로는 왕자에게 옛 백제 지역을 다스리게 한 것이었지만, 실제로는 당이 지배하겠다는 속셈을 갖고 있었습니다. 당나라는 또 신라에 계림 도독부를 둔다 이르고, 문무왕을 계림주 대도독으로 불렀습니다.

당은 이렇듯 신라마저 당의 꼭두각시 정권으로 취급했습니다.

한편 태종 무열왕 김춘추의 아들이자 김유신 장군의 조카인 김법민은 661년 문무왕에 오릅니다. 당시 당나라로부터 온갖 수모를 겪고, 백성도 고통을 겪어야 했지만 문무왕은 때를 기다렸습니다. 당나라와 사이가 나빠지면, 백제를 멸망시키기 위해 들였던 모든 노력이 물거품이 될 것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문무왕은 무리하게 당과 충돌하지 않기 위해 당장 백제 땅에 욕심 내지 않았습니다. 그는 666년 4월 당나라에게 고구려를 공격하자고 제안했습니다.

이에 당나라는 100만 대군을 동원해 고구려를 총 공격했습니다.

문무왕도 668년 6월 20만의 군대를 동원해 고구려 공격에 나섰습니다.

그 뒤 신라군은 고구려 남부 지역을 장악하고 고구려 수도인 장안성을 포위합니다. 즉, 9월 26일 고구려를 멸망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입니다.

이즈음 문무왕은 당나라와 전쟁할 때가 왔음을 예견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고구려를 멸망시키기 위한 공격 중에도 힘을 비축해 놓았습니다.

이처럼 철저한 계획을 갖고 당을 몰아 내겠다는 굳은 의지를 가진 문무왕의 혜안이 없었다면 신라마저도 당나라의 지배를 받았을지 모릅니다.

이제 삼국 통일 전쟁은 신라와 당나라의 결승전만을 남겨 두게 되었습니다.

 

김용만 우리역사문화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