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사연재글

2006년 소년한국일보 연재 13회 - 법흥왕

영양대왕 2006. 6. 4. 21:03
법흥왕 - 율령 시행·연호 사용하며 왕권 강화


이차돈의 목에서 흰 피가 솟구쳐 나오는 순교의 모습과 그 관련 내용을 새겨 놓은 이차돈 순교비. 국립경주박물관 소장.

불교 공인한 법흥왕

신라는 불국사와 석굴암으로 상징되는 나라입니다. 하지만 삼국 가운데 가장 늦게 불교가 전파됐습니다. 고구려가 372년, 백제가 384년에 불교를 종교로 인정한 데 비해, 신라는 527년에야 비로소 불교를 종교로 받아들입니다. 이처럼 신라는 삼국 중 가장 늦게 불교를 인정했지만, 가장 열심히 불교를 믿고 또 불교 예술을 발전시킵니다.

이차돈의 순교로 신라 불교 번성

신라에 불교가 처음 들어온 때는 눌지마립간(417년∼458년) 시기입니다. 당시 고구려의 스님 묵호자가 전파하였습니다. 특히 514년 왕의 자리에 오른 모즉지왕은 불교를 인정하고 이를 널리 발전시키고자 노력하였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신하들은 고유의 신앙을 숭배하며, 불교를 반대하고 있었습니다. 이 때 이차돈이 나서서 왕에게 아뢰었습니다.

“저의 목을 베어 여러 사람들의 갈라진 의견을 하나로 모으십시오. 만약 불교의 가르침이 신라에서 이뤄진다면, 저는 죽더라도 후회가 없을 것입니다.”

왕은 신하들을 불러 의견을 물었습니다.

신하들은 불교에서는 스님들이 머리를 깎고 이상한 복장과 괴이한 말을 하니, 비록 임금의 뜻을 어겨 큰 벌을 받게 되더라도 명령을 받들 수 없다며 반발했습니다.

이 때 이차돈이 홀로 나서서 불교의 깊은 뜻을 알린 것입니다.

왕은 여러 사람들의 의견이 워낙 강경해 이를 꺾지 못하겠으며, 그대만 반대하니 어쩔 수 없이 목을 베어야겠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이차돈이 말했습니다.

“나는 불교의 가르침을 알리기 위해 죽는다. 만일 부처님의 영험이 있다면 내가 죽고 나서 반드시 신기한 일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차돈의 목을 베자, 그 곳에서 하얀 피가 솟아 나왔습니다.

이를 신기하게 여긴 신하들은 더 이상 불교를 비난하지 못했습니다.

모즉지왕(법흥왕)의 이름과 524년 왕의 활약상을 기록한 울진 봉평비.

법질서 확립·영토 확장

이차돈의 목에서 하얀 피가 솟았다는 것은 좀처럼 믿기가 어렵습니다. 그런데 이 일을 계기로 모즉지왕은 불교를 종교로 인정하고, 불교가 널리 전파되도록 장려하게 됩니다. 그래서 불교를 일으킨 왕이란 뜻을 지닌‘법흥왕’으로 불려지게 되었습니다. 법흥왕은 또 말년에는 아예 머리를 깎고 스님의 옷을 입고 살 정도로 불교의 세계에 깊이 빠져들었습니다.

신라의 불교는 이렇듯 법흥왕과 이차돈의 노력에 의해 크게 발전합니다.

특히 법흥왕은 불교를 진흥시킨 것 외에도 많은 업적을 이룹니다. 그 가운데 주목할 것은 520년에 법체계인 율령을 만들어 시행한 것입니다. 이를 계기로 신라는 보다 빠르게 국가의 발전을 이루게 됩니다.

1988년에 발견된 울진 봉평비에는 524년 법흥왕이 울진 지역을 방문해 법에 의해 일처리를 한 내용이 구체적으로 기록돼 있습니다.

한편 신라가 발전해 가는 사이 세력이 차츰 약화되던 금관 가야는 532년 마지막 왕인 구해왕이 왕자들과 함께 신라에 스스로 항복하기에 이릅니다. 이로써 신라는 김해 지역의 넓은 평야와 항구, 수많은 인재를 확보합니다.

법질서를 확립하고 영토까지 확장하자 법흥왕의 권력은 더 강해졌습니다. 그 결과 535년 이후에는 ‘성 법흥 대왕’ㆍ‘모즉지 대왕’이라고 불렸습니다.

대왕이라는 칭호는 단순히 왕이 아니라 강력한 권력을 가진 임금이라는 뜻을 지닙니다. 또한 주변국인 가야 등의 왕과는 차별된 존재라는 것을 말해 줍니다. 법흥왕은 특히 536년에는 처음으로 ‘건원’이라는 연호를 사용합니다. 연호는 매년 횟수를 매길 때 사용하는 칭호로, 고구려의 ‘영락’이라는 연호처럼 천하의 중심 국가만이 사용할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법흥왕은 이제 신라가 주변국의 눈치를 보는 나라가 아니라, 고구려 등과 어깨를 나란히하는 자주적인 왕국임을 세상에 널리 알리게 된 것 입니다.


김용만(우리역사문화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