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사연재글

2006년 소년한국일보연재 11- 나제동맹

영양대왕 2006. 5. 21. 2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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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1000년의 비밀] 고구려 간섭 벗어나려 적과 손잡아
나·제 동맹

서기 400년 신라는 고구려로부터 도움을 받은 것을 계기로 오랜 기간 고구려의 속박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차츰 신라는 고구려의 간섭에서 벗어나 자주적인 발전을 위해 노력을 해 나갔습니다.

그 첫 시도가 고구려인에 의해 왕위에 오른 눌지마립간이 418년 박제상을 고구려에 사신으로 보내 인질이었던 복호를 데리고 온 일입니다.

둘레 1680 m인 삼년산성의 성문과 성벽. 삼년산성은 최고 높이 20 m로, 세계문화유산 잠정목록(현재 8 건)의 하나로 등재될 만큼 문화적 가치가 크다.

고구려로부터 제후국 대접 받아

433년에는 신라의 적이었던 백제가 화친을 하자며 먼저 사신을 보내 왔습니다. 그리고 거듭 좋은 말과 매 등을 선물로 보내 오자, 눌지마립간도 고구려에게 억압받고 있는 백제에게 사신을 보내 화친을 하자고 요청하기에 이릅니다.

그런 이유로 신라와 고구려는 점차 멀어지게 됩니다. 마침내 450년에는 고구려 변방의 장수가 신라 하슬라 성주에게 살해되는 사건이 일어납니다.

우발적인 사건이었지만, 고구려는 당장 사신을 보내 신라를 꾸짖고 또 군사를 보내 공격해 왔습니다. 신라는 서둘러 사과를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중원고구려비’에는 당시 고구려 군이 신라 영토 안에 군대까지 주둔시키고 있었으며, 고구려 태자의 명령에 따라 신라 임금이 달려와 의복을 받아 갔다는 내용이 적혀있습니다. 고구려에서는 신라를 제후국으로 대우했던 것입니다.

이런 불리한 상황에서 ‘일본서기’에는 464년 신라인들이 영토 안에 있는 고구려 군 100 명을 갑자기 공격해 모두 죽였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이는 신라가 고구려의 간섭에서 벗어나고자, 적극적인 행동을 했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하지만 강한 고구려를 신라 혼자 힘으로 몰아 낼 수는 없었습니다.

이 때 신라에게 힘을 준 존재가 바로 백제였습니다.

신라는 백제와 동맹을 맺고, 협력하기 시작합니다. 455년 고구려가 백제를 공격하자, 눌지마립간은 군사를 보내 백제를 구원하기도 했습니다.

삼년산성 문터. 성문을 달았던 흔적이 뚜렷하다.

백제와 힘 합치며 한강 유역 진출 준비도

475년에는 고구려 장수왕이 백제의 한성을 함락시키고, 개로왕을 죽인 적이 있었습니다. 이 때 개로왕의 아들 문주는 신라에 구원을 요청했고, 신라 자비마립간은 즉시 군사를 보냈습니다. 고구려가 충주(국원성)를 중심으로 남쪽에 다시 지배력을 강화시키자, 신라는 더욱 백제와 협력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481년 고구려가 말갈과 함께 신라의 북쪽 일곱 성을 함락하고, 미질부로 진격해 왔습니다. 미질부(포항시 흥해읍)는 신라 수도 경주에서 멀지 않은 곳입니다. 이러한 위기 상황에서 백제와 가야의 구원병들이 신라에 도착했습니다. 그리고 세 나라 군대는 힘을 합쳐 결국 고구려 군을 막아 내었습니다.

그 뒤 고구려와 신라의 사이가 더 벌어지자, 493년 백제 동성왕은 사신을 신라에 보내 혼인동맹을 요구하기에 이릅니다. 신라는 즉시 승낙했습니다.

이로써 두 나라는 동맹 관계를 더욱 굳건하게 이어가게 됩니다.

마침내 494년 고구려는 신라를 공격해 왔습니다. 신라 군은 고구려 군에게 쫓겨 견아성으로 후퇴하였고, 성을 포위당하기에 이릅니다. 그러자 백제 동성왕이 3000여 명의 군사를 보내 고구려를 물리칠 수 있도록 돕습니다. 화가 난 고구려는 다음 해에는 백제의 치양성을 공격했습니다.

그러자 신라 왕은 즉시 군사를 보내 백제를 구원했으며, 백제왕은 사신을 통해 감사를 표했습니다. 이렇듯 신라는 백제와 동맹을 통해 고구려를 몰아 내는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1000만 개의 돌로 요새 만들어

그런데 신라는 470년 3 년에 걸쳐 충북 보은 지역에 약 1000만 개의 돌(20만 톤)로 견고하게 삼년산성을 쌓았습니다.

삼년산성은 백제ㆍ가야ㆍ고구려와의 경계선에 놓인 중요한 요새입니다.

이 삼년산성은 신라가 한 번도 다른 나라에 빼앗기지 않은 성입니다.

신라는 이 곳을 기반으로 더 먼 곳까지 내다봤습니다. 즉 산성은 한강 유역으로 진출하기 위한 교통망이자 백제와의 전쟁에 대비한 성이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신라는 백제와 손을 잡아 당장의 위기를 헤쳐나갔을 뿐만 아니라, 미래를 위한 준비에도 소홀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6세기에는 큰 발전을 이루게 됩니다.


김용만(우리역사문화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