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사연재글

2006년 소년한국일보 연재 9회 - 충신 박제상.

영양대왕 2006. 5. 8. 00:03

 

 

목숨 바쳐 신하의 도리 지키다
충신 박제상

“왜국의 신하가 되면 후한 녹봉(벼슬아치에 연봉으로 주는 곡식이나 돈 따위)을 주겠노라.”

“차라리 계림(신라)의 개와 돼지가 될지언정, 왜국의 신하는 절대 되지 않겠다.”

왜왕은 크게 화를 내며 박제상의 발 가죽을 벗기고 갈대를 베어 그 위를 걷게 하였습니다. 그런 뒤 다시 한 번 물었습니다.

“너는 어느 나라 신하이냐?”

“나는 계림의 신하다.”

왜왕은 끝내 굴복시킬 수 없음을 알고 그를 불에 태워 죽였습니다.

이는 왜국 왕의 갖은 협박에도 지조를 끝까지 지켜 낸 신라 충신 박제상의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는 ‘삼국유사’와 ‘삼국사기’ 등에 기록돼 있습니다.

그런데 박제상은 왜 이국 땅에서 이 같은 죽임을 당해야 했을까요? 이제부터 그 이유를 살펴보겠습니다.

박제상과 그의 부인인 치술신모를 기리기 위해 세운 치산서원. 경북 울주군 두동면에 있다.

고구려 불모였던 복호 찾아와

박제상은 파사이사금의 5대손입니다. 그의 아버지는 신라 4위 관등인 파진찬을 지냈습니다. 박제상은 어릴 때부터 지혜가 뛰어나고 용감하여 여러 사람들의 칭찬을 받았습니다. 그가 양산에서 벼슬을 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신라 왕인 눌지마립간이 그를 궁으로 불렀습니다.

박제상에게 도움을 청해 마음 속의 근심을 풀기 위해서였습니다.

왕의 아버지인 내물마립간은 예전에 고구려에 실성을 볼모로 보낸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실성이 돌아와 마립간이 된 뒤 자신을 볼모로 보낸 내물마립간의 두 아들 가운데 미사흔은 왜국에, 복호는 고구려로 보냄으로써 과거의 일에 대해 분풀이를 했습니다.

따라서 실성을 몰아 내고 마립간이 된 눌지가 가장 먼저 하고자 했던 일은 바로 두 동생을 고구려와 왜국으로부터 데려오는 일이었습니다.

눌지마립간은 박제상에게 고구려에 가서 복호를 데려와 달라고 청했습니다. 임금의 명을 받들어 곧바로 고구려로 간 박제상은 복호를 데리고 신라에 무사히 돌아왔습니다. 왕은 크게 기뻐했지만 왜국에 볼모로 잡힌 동생 때문에 또다시 슬픔에 빠졌습니다.

박제상의 위패와 영정을 모신 사당인 충렬묘. 치산서원 안에 있다.

왜국서 미사흔 탈출시킨 뒤 희생돼

박제상은 다시금 왜국으로 향했습니다. 그런데 왜국은 순순히 말로 설득할 수 있는 나라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꾀를 내어 자신이 신라를 배신해서 왜국으로 도망간 것이라는 소문을 내 달라고 눌지마립간에게 부탁했습니다.

그는 집에도 들르지 않고 아내에게도 알리지 않은 채 배를 타고 떠났습니다. 박제상의 아내가 이를 알고 포구로 달려갔으나 이미 늦었습니다. 그녀는 그 곳에서 박제상을 기다리며 통곡하다가 죽었습니다.

사람들은 그녀를 치술신모라 부르고, 남편에 대한 의리를 지킨 그녀를 위해 사당을 만들고 제사를 지내 주었습니다.

한편 왜국에 간 박제상은 왜왕의 신임을 얻는 데 성공했습니다.

왜국은 신라가 고구려와 함께 왜국을 공격할 것이라는 백제의 첩보를 듣고, 신라를 먼저 공격할 준비를 했습니다. 그래서 박제상과 미사흔을 장수로 임명하는 한편 이들을 신라 공격의 길잡이로 삼았습니다.

박제상은 왜국이 전쟁 준비로 혼란한 틈을 타 미사흔에게 자신의 본래 신분을 밝힌 뒤 왕자를 탈출시킬 계획을 세웠습니다.

박제상은 안개가 심한 날 미사흔을 몰래 배를 태워 신라로 보냈습니다. 그리고 자신은 왜국에 남아 왜병들이 왕자가 탈출한 것을 모르게 하려고 시간을 끕니다. 이를 알게 된 왜왕은 크게 화가 나 박제상을 죽였던 것입니다.

이 같은 박제상의 희생으로 고구려ㆍ왜국에 잡혀 있던 미사흔과 복호는 무사히 신라로 돌아왔습니다. 하지만 박제상 자신은 머나먼 이국 땅에서 목숨을 잃고 맙니다. 후손들은 그의 이러한 희생 정신을 기리기 위해 해마다 제사를 지내며 추모하고 있습니다.


김용만(우리역사문화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