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사연재글

2006년 소년한국일보연재 8 - 고구려와의 관계

영양대왕 2006. 5. 1. 12:03
고구려와의 관계
군사적 도움 받으면서 간섭 벗어날 방법 찾아

청동네귀항아리(경주박물관 소장품). 5세기 무덤인 금관총에서 나온 유물로, 고구려에서 생산돼 신라인의 무덤에 장식된 것으로 보인다.

●내물마립간 시대 이후 소국들에 대한 통제력 키워

신라는 건국 후 가야나 왜국과 잦은 전쟁을 치렀습니다. 이러한 가운데서도 실력을 꾸준히 키워 2세기 중반에는 낙동강 동쪽과 강릉 남쪽 해안가 일대의 작은 나라들을 차례로 정복했으며, 점차 이들을 신라인으로 포용해 갔습니다.

당시 신라의 왕은 ‘이사금’으로 불렸습니다. 이사금은 나이가 많은 연장자라는 의미를 갖고 있는데, 연맹체의 동의를 얻어 왕이 뽑혔음을 알려 줍니다. 이때 이사금은 박씨ㆍ석씨ㆍ김씨 등 세 씨족에서 교대로 나왔습니다.

그 가운데 13대 미추이사금은 김알지의 후손 중 처음 왕이 된 인물입니다.

미추이사금 이후 김씨 세력은 크게 힘을 키워 17대 내물마립간 시대(356∼402)에 이르면 왕위를 마침내 김씨가 독점하게 됩니다.

마립간은 이사금과 달리 ‘큰 우두머리’(대군장)라는 뜻입니다. 임금의 호칭이 바뀐 것으로 보아 이 시기에는 권력이 한 사람에게 집중됐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마립간 때는 신라를 구성하는 6부의 통제력을 크게 강화했을 뿐만 아니라, 신라에게 복속한 작은 나라들에 대한 지배력도 강해졌습니다.

가야가 작은 소국들의 연합체를 유지하느라 권력을 집중하지 못한 반면, 신라는 작은 소국들을 완전히 합쳐 강한 나라를 만드는 데 성공했던 것입니다.

또한 고구려의 도움으로 황하 유역에 있는 전진이란 나라에까지 사신을 보내 국교를 맺습니다. 이웃한 고구려ㆍ가야ㆍ왜국을 벗어나 먼 나라와 교류를 맺었다는 것은 신라인이 세계를 보는 시각이 달라졌다는 것을 알려 줍니다.

●지원군 요청 뒤 간섭 받기 시작

경주 노서동 고분군에 위치한 호우총. 고구려 광개토 대왕의 제사에 사용된 청동 그릇인 호우가 이 무덤 안에서 발견되었다.

그런데 399년 신라에 큰 사건이 일어납니다. 가야와 왜가 연합해 신라를 공격해 온 것입니다. 내물마립간은 위기를 이겨내기 위해 고구려 광개토 대왕에게 원군을 요청하기에 이릅니다. 400년, 고구려의 5만 군대는 신라에 들어와 가야·왜 연합군을 물리칩니다. 이로써 신라는 위기를 넘길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신라는 이때부터 고구려의 강한 간섭을 받아야 했습니다.

‘일본서기’에는 신라 수도에 고구려군 100여 명이 주둔하고 있었다는 기록이 있으며, ‘중원 고구려비’에도 고구려 장수가 머문 것을 보여 주는 글귀가 보입니다. 고구려가 신라를 살렸으니, 신라 영토 깊숙이까지 군대를 보내고 정치에도 관여하는 등 신라를 속국처럼 취급하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었습니다.

한편, 내물마립간이 죽은 뒤 신라의 다음 왕위는 고구려에 볼모로 가서 10 년을 보내고 돌아온 실성이 차지하게 됩니다. 실성마립간은 자신을 고구려에 볼모로 보낸 내물마립간에 대한 보복으로 그 아들 복호를 고구려에 볼모로 보냈습니다.

또 내물마립간의 태자였던 눌지가 백성들의 인기를 얻자, 자신이 고구려에 볼모로 있을 때 알고 지내던 고구려 사람들에게 부탁해 눌지를 죽이라고 명령하기에 이릅니다. 하지만 고구려 사람들은 이미 눌지가 훌륭한 사람임을 알고, 도리어 실성마립간을 죽이고 눌지를 마립간이 되게 했습니다.

●고구려의 문화 받아들여 발전의 계기 삼아

신라 땅이었던 울산에서 발견된 고구려 적석총. 울산 지역에 주둔한 고구려 해군 사령관의 무덤으로 추정되고 있다.

고구려는 이처럼 신라 정치에 깊숙이 개입했습니다. 당시 신라는 고구려의 눈치를 보는 나라였으며, 이는 분명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습니다.

신라는 그러나 이러한 위기 상황을 슬기롭게 극복해 나갔습니다.

신라에게는 고구려가 분명 도움이 되는 나라이기도 했습니다. 고구려가 있음으로 해서 왜와 가야가 신라를 함부로 하지 못했으니까요. 왜의 해군이 신라에 머물던 고구려 해군에게 격파되는 일도 있었습니다. 또 신라의 가장 큰 적이었던 가야가 고구려의 공격으로 크게 약해진 것도 신라에게는 좋은 기회가 되었습니다.

신라는 차츰 가야ㆍ왜ㆍ백제 등의 침략 위협에서 벗어나, 고구려의 앞선 기술·문화ㆍ제도를 받아들여 신라 발전의 계기로 활용합니다. 신라는 또 고구려를 통해 소백산맥 넘어 한강 유역으로부터 대륙에 이르기까지 넓은 세계를 경험합니다.

고구려의 지원을 받아 왕위에 오른 눌지마립간 이후 신라 왕들은 고구려를 따르면서도, 고구려를 극복할 방법을 찾기 위해 백제와 비밀리에 동맹을 맺기에 이릅니다. 신라의 이러한 노력은 100 년이 넘은 뒤에야 결실을 맺게 된답니다.


김용만(우리역사문화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