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사연재글

2006년 소년한국일보연재 7 - 일본과의 관계

영양대왕 2006. 4. 24. 00:37
일본과의 관계
예나 지금이나 골칫거리

●일본으로 건너가 앞선 문화 퍼뜨려

신라의 수도 경주에서 가장 높은 산인 토함산에 오르면 동해가 훤히 보입니다. 동해는 신라인에게 있어 해외로 진출하는 고속 도로였으며, 동시에 적이 쳐들어오는 길목이기도 했습니다.

앞서 살펴보았던 연오랑과 세오녀의 전설은 신라인이 동해를 거쳐 일본 열도로 자주 건너갔음을 알려 줍니다.

‘일본서기’에는 신라의 왕자인 천일창이 칼ㆍ창ㆍ거울 등 7∼8 개의 보물을 갖고 일본 열도로 건너가 단마국에서 살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김해 대성동 고분에서 나온 왜국 계통 유물인 파형 토기. 신라 초기 왜국인이 한반도에 자주 드나들었음을 알려 준다.

천일창은 일본 열도에 철기 문명을 전해 준 인물입니다. 지금도 일본의 효고현 이즈시(出石) 신사에서는 그를 신으로 모시고 제사를 올리고 있기도 합니다.

지금은 포항이나 울산에서 배를 탄 어부가 해류에 휩쓸려 일본 열도의 북쪽에 도착하는 일이 흔하지만, 신라 초기만해도 일본 열도는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는 곳이 더 많았습니다. 당시 연오랑과 세오녀ㆍ천일창 등은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가 일본 열도를 개척하고 앞선 문화를 퍼뜨렸던 것입니다.

신라와 일본 열도와의 관계는 이것만이 아닙니다.

‘삼국사기’에는 왜국과 관련된 기록이 나옵니다. 왜국은 일본 열도에 있었던 일본의 조상 국가로, 신라 초기부터 신라와 관계를 맺었습니다. 석탈해에게 집을 빼앗겼던 박혁거세의 신하인 호공은 왜국 출신이었습니다.

이렇듯 왜국 사람들 역시 한반도로 건너오기도 했습니다. 김해 대성동 고분 등 남해안 곳곳의 유적에서는 요즘도 왜국인과 관련된 유물을 쉽게 찾을 수 있습니다. 두 나라는 이처럼 왕래하며 서로의 문화를 전파해왔던 것입니다.

●노략질 일삼는 왜국과 끊임없이 싸워

‘삼국사기’에는 신라 4대 탈해이사금 3년 때 왜국이 신라에 사신을 파견해 처음으로 두 나라가 외교 관계를 맺었다고 기록돼 있습니다. 이후 신라와 왜가 전쟁을 했다는 기록이 자주 보입니다. 석 씨 왕족으로 서불한이란 최고의 관직에 있었던 석우로라는 인물에 대한 이야기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석우로가 왜국 사신을 접대하는 자리에서 ‘조만간 너희 왕을 소금 만드는 노예로 삼고 왕비는 음식 만드는 노예로 삼겠다.’며 희롱하였습니다. 왜국 왕은 이를 전해 듣고 군대를 보내 신라를 공격해왔습니다. 그러자 석우로가 직접 왜군에 가서 지난 일은 농담이었다고 해명했지만, 왜국 사람들은 그를 불에 태워 죽였습니다.

죽어서 동해의 용왕이 돼 왜적의 침략을 막겠다는 의지를 보여준 문무 대왕의 수중 무덤.

몇 년 뒤, 왜국 사신이 신라를 방문하자 석우로의 아내는 왕에게 청해 왜국 사신의 음식을 접대했습니다. 왜국 사신이 취하자 석우로의 아내는 그를 끌어내 불에 태워 죽여 남편의 원한을 갚았습니다. 왜국 사람이 다시 화를 내어 신라를 공격했으나 이기지 못하고 되돌아갔습니다.”

석우로는 자신의 실수로 신라 군인과 백성들이 피를 흘리게 될 것을 막기 위해 직접 왜군에게 갔던 것이고, 그가 죽자 그의 아내가 원수는 갚았지만 두 나라의 관계는 더 나빠졌습니다. 신라에게 왜국은 이처럼 여간 골칫거리가 아니었습니다.

14대 유례이사금은 왜국을 먼저 공격할 것을 계획하기도 하지만, 바다 전투에 익숙하지 못하다는 이유로 실행에 옮기지 못하고 맙니다.

한편, 양국의 전쟁은 대체로 왜국에서 군대를 동원해 신라를 공격하고, 신라가 이를 막아내는 모양새였습니다. 그런데 왜 신라는 왜국을 먼저 공격하지 못했던 것일까요? 신라는 가야를 비롯한 주변의 나라와 싸워야 했으므로 해군을 육성하지 못한 탓도 있지만, 무엇보다 왜국을 공격해서 얻을 이익이 별로 없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왜국 사람들에게 신라는 금과 은의 나라, 풍요한 나라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반면 왜국은 노략질을 하지 않으면 굶주려야 하는 가난한 나라였습니다. 그래서 왜국은 신라를 노략질하기 위해 공격했고, 신라는 풍요로운 땅을 지키기 위해 맞서 싸웠던 것입니다.


김용만(우리역사문화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