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사연재글

2006년 소년한국일보연재 6 - 신라에 유목민이 왔을까?

영양대왕 2006. 4. 16. 17:04

 

신라에 독특한 유물이 많은 까닭은?
보검·금관·유리·뿔잔 등

경주 대릉원지구 계림로 14호분에서 나온 장식 보검(왼쪽)과 키질 석굴에서 발견된 장식 보검. 두 개의 검이 많이 닮았다.

●장식 보검은 훈족 아틸라 왕 시대에 유행

경주 시내 중심지인 계림로 14호분에서는 특이한 형태의 장식 보검이 발굴됐습니다. 이 보검은 고구려ㆍ백제ㆍ왜국 등에서는 전혀 볼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와 닮은 장식 보검은 카자흐스탄의 보르보예에서도 출토된 바 있습니다.

특이한 건 신라에서 수천 km 떨어진 쿠차 왕국의 키질 석굴 69굴 입구 천장 벽화에 그려진 사람의 허리에도 이 같은 형태의 보검이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이 보검은 5세기에 유럽을 공포에 떨게 했던 훈족의 아틸라왕 시대에 유행했으며, 그리스ㆍ로마ㆍ이집트ㆍ서아시아에서 장식 검으로도 쓰였습니다.

신라의 대표적 유물인 금관은 현재 세계적으로 10 개 정도만 알려져 있습니다. 그 가운데 교동 출토 금관을 비롯해 금관총ㆍ서봉총ㆍ황남대총 북분ㆍ금령총ㆍ천마총에서 출토된 신라 금관이 6 점이나 됩니다. 그런데 신라 금관과 유사한 금관은 중앙아시아 아프카니스탄의 시바르간에서도 발견됐습니다.

4세기 중엽부터 만들어지기 시작한 신라 무덤들은 나무로 시신을 넣은 관을 넣어 두는 곽을 만들고, 다시 돌을 쌓아 그 위에 흙을 덮는 ‘적석 목곽분’ 형태였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형태의 무덤들은 중앙아시아 알타이 산맥 주변의 파지리크 고분군에서 발견되는 무덤과 꽤 닮았습니다.

또 금관총ㆍ황남대총ㆍ천마총 등 신라의 대형 무덤에서는 20여 점의 유리 제품이 출토된 바 있습니다. 이 가운데에는 저 멀리 지중해 주변에서 제작돼 흑해와 남러시아를 거쳐 신라로 들여온 ‘로만-글라스’가 많습니다.

또 중동 지역인 페르시아의 ‘커트-글라스’와 같은 유리 제품도 보입니다.

미추왕릉 지구에서는 더 나아가 지중해ㆍ서아시아ㆍ북중국ㆍ가야ㆍ일본 등에서 출토된 뿔잔이 나왔습니다. 그런데 뿔잔을 사용하는 풍습은 주로 스키타이ㆍ흉노 등 말을 타고 이동하는 유목민들에서 보여지는 것입니다.







●세계 곳곳과 교류한 '열린 나라'

아프카니스탄 시바르간에서 발굴된 금관. 신라 금관과 유사하다.

신라 유물 중에는 이처럼 중앙 아시아나 시베리아 등 북방 유목민과 관련된 것이 많습니다. 때문에 일부 연구자들은 신라를 북쪽에서 내려온 사람들에 의해 세워진 것이라는 주장을 하기도 합니다. 특히 신라의 왕을 배출한 3 개 성씨 가운데 김씨 집단이 북쪽 유목민 출신이라는 주장이 적지 않습니다.

황남대총 북분에서 출토된 봉황머리 모양의 유리병.

또 김씨의 시조인 김알지의 알지란 이름도 알타이어로 금(金)을 뜻하는 알트ㆍ알튼ㆍ알타이에서 알지로 변한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신라는 분명히 토착 세력에다 외부 세력이 연합해서 건설한 나라입니다.

그런데 이웃 나라를 빼고 유독 신라만 유목민과 교류를 했던 것일까요?

물론 아닙니다. 가야 유적인 김해 대성동 고분에서도 유목민이 사용하는 야외 취사용 그릇인 ‘동복’, 뿔잔 모양의 토기가 여럿 나오기도 했습니다.

고구려 덕흥리 고분의 널방 북쪽 벽면에도 부하가 무덤의 주인공을 향해 잔을 올리는 장면이 보입니다. 동복도 고구려 지역에서 출토돼 현재 집안시 박물관에 전시돼 있습니다. 안악3호분 부엌 그림에서도 유리 그릇이 보입니다.

이처럼 고구려ㆍ백제에서도 북방 유목민과 교류한 유물이 남아 있습니다.

하지만 신라에서 유목민과 교류한 흔적이 월등히 더 많습니다.

이유는 고구려ㆍ백제와 달리 외적에 의해 멸망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유목민과 교류한 흔적이 두 나라보다 더 많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일부 학자들은 성급하게 신라의 기원을 북방 유목민과 연결시켜 보려는 주장을 하기도 하지만, 아직은 풀어야 할 수수께끼들이 많습니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신라가 대륙 동쪽 끝에 자리한 변두리 나라가 아니라, 세계의 여러 곳에서 사람들이 찾아오는 열려 있는 나라였다는 사실입니다.


김용만(우리역사문화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