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사연재글

2006년 소년한국일보 연재 4- 가야와의 관계

영양대왕 2006. 3. 26. 21:57
[신라 1000 년의 비밀] 가야와의 관계
금관가야 견제·경쟁하며 힘 키워

창녕 교동고분군. 신라와 가까운 곳에 자리했던 비화가야의 지배층 무덤이다.

신라 건국 이전 낙동강 동쪽 지역에는 진한 12 개국, 서쪽엔 변한 12 개국이 있었습니다. 신라는 진한 12 개국 가운데 하나였던 사로국에서 출발했습니다.

신라(사로국)는 주변의 작은 나라들을 차례로 굴복시키면서 점차 진한의 맹주국이 되어 갔습니다. 신라는 그러나 압독국ㆍ이서국 등 가까이에 위치한 나라를 완전히 점령하지 못했습니다.

주변 나라들을 완전히 제압할 만큼 힘이 있어야 하는데 상황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예를 들면 신라 남서쪽에 있었던 이서국의 경우 때로는 신라의 수도인 금성을 위협하기도 했습니다.

그렇지만 신라가 낙동강 동쪽에서 최강의 나라라는 위상이 변할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경제력과 국력에서 앞섰던 금관가야

신라 최대의 경쟁자는 낙동강 동쪽에서 발전하고 있던 가야 연맹이었습니다. 그 가운데 맹주국인 금관가야는 김수로왕 때부터 크게 번영하고 있었습니다.

낙동강과 남해 바다가 만나는 김해 지역에 위치한 금관가야는 해상 교통의 요충지로서 주변 지역의 철을 해외에 수출하는 창구 역할을 하는 등 신라보다 앞선 경제력과 국력을 갖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정황은‘삼국사기’에도 잘 드러나고 있답니다.

“서기 102년 음집벌국과 실질곡국 두 작은 나라가 영토 경계를 놓고 다투다, 신라 5대 임금인 파사이사금에게 와서 시비를 가려 달라고 요청하였습니다.

파사이사금은 어느 한 쪽을 편들기가 난처했습니다. 그래서 금관가야국의 김수로왕이 나이가 많고 지식이 많다고 하므로, 그를 모셔다가 묻기로 했습니다.

김수로왕은 다툼이 된 땅을 음집벌국에게 주었습니다. 김수로왕이 일을 마치자 신라 파사이사금은 신라 6 부를 모두 모이도록 해 그를 위한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그런데 신라 5 부는 높은 관리를 내보내 손님 접대를 했으나, 오직 한지부만이 낮은 자를 보내 접대를 주관하게 했습니다.

그러자 김수로왕은 크게 화를 내서 노비인 탐하리란 자에게 명령하여 한지부의 우두머리인 보제를 죽이고 돌아갔습니다.

이 사건이 벌어진 연대는 확실하지 않지만, 신라와 가야의 관계가 어떠했는지 알려 줍니다. 신라 영향권 안에 있는 두 나라의 중재를 금관가야의 왕이 했다는 것만으로도 당시 금관가야국의 힘이 대단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 김수로왕이 신라 6 부의 지도자를 죽였지만, 신라는 항의도 못하였습니다.

가야를 건국한 김수로왕의 무덤.

● 낙동강 하류 지역서 팽팽한 대결

석탈해의 설화 가운데 금관가야와 관련된 것이 있습니다.

석탈해는 신라에 닿기 전 금관가야에 도착했습니다. 그는 가야의 왕이 되기 위해 김수로왕에게 도전했는데, 그만 싸움에 져 신라로 도망 왔다고 합니다. 신라에 온 석탈해는 결국 신라의 왕이 됐습니다.

이 같은 기록을 볼 때 초기 신라에 비해 김수로왕이 다스리는 금관가야국이 훨씬 견고한 정치 조직과 군사력을 갖춘 나라였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가야는 또 신라의 남쪽 지방을 자주 공격해 오기도 했습니다. 때로 신라 변방의 성을 점령하고 성주를 죽이기도 했습니다. 물론 신라도 반격을 했습니다. 특히 지마이사금은 가야를 정벌하기 위해 보병과 기병을 거느리고 황산하를 건너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물러나고 말았습니다. 그 다음 해 정예병 1만 명을 동원해 다시 공격했지만 또 실패했습니다.

삼국사기는 이 사건이 서기 115년~116년에 일어났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두 나라는 치열하게 전쟁을 계속했습니다. 특히 황산하 즉, 오늘날 낙동강 하류 지역은 두 나라간의 팽팽한 대결이 벌어졌던 곳입니다. 신라는 가야와의 대결을 통해 힘을 키웠지만, 그 때문에 소백산맥 남쪽 전체를 장악하지 못했습니다. 자연히 고구려와 백제보다도 뒤쳐져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김용만(우리역사문화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