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사연재글

2006년 소년한국일보연재 3 - 경주가 중심지가 된 이유

영양대왕 2006. 3. 20. 00:53
 

 

[신라 1000년의 비밀] 경주 중심지 된 이유 있었다
천 년의 수도 경주…편리한 교통망에 철 생산 기술 갖춰
풍부한 지하 자원·농사 환경도 좋아


경주시는 오늘날 인구 30만의 관광 도시로 대구ㆍ포항ㆍ울산 등 주변 지역에 비해 그리 넓지 않습니다. 그러나 신라 시대에는 경상도 지역에서 가장 중요한 도시였습니다. 경상도란 이름도 ‘경주’와 ‘상주’가 있는 지방이란 뜻입니다. 경상도는 낙동강에 의해 크게 동쪽과 서쪽으로 구분됩니다.

경주는 낙동강 동쪽 일대에서 육상 교통의 요충지였습니다. 북으로 포항과 영덕으로 연결되고, 남으로는 양산을 거쳐 부산으로 이어졌지요. 또 서쪽으로는 영천을 거쳐 안동과 영주로, 다시 영천에서 경산ㆍ대구로 이어집니다. 그리고 남서쪽으로는 밀양과도 연결됩니다.

이렇듯 주변 지역과 잘 연결되는 좋은 교통로를 갖고 있다는 점이 경주가 낙동강 동쪽에서 중심지로 성장할 수 있는 요인이 됐습니다.

●남쪽 달천은 공급 기지

사라리 130호분에서 나온 호랑이 모양 허리띠 고리.

경주 남쪽에는 달천 광산이 있습니다. 당시 철을 공급하는 기지였지요. 현재 경주 일대에서 나온 신라의 철 제품들은 모두 이 지역의 것임이 밝혀졌습니다.

경주시 황성동에서는 또 삼국 시대 초기에 만들어진 철을 녹이는 용해로, 철을 가공하는 단야로 등이 발견되기도 했습니다. 황성동 유적은 이처럼 신라인이 달천에서 철을 가져와 이 곳에서 가공해 사용했다는 것을 잘 보여 줍니다.

초기 신라의 유적인 조양동 5호분 출토 유물들.

과거에는 철을 가공해 무기와 농기구 등을 만드는 게 중요한 기술이었습니다. 무기와 농기구는 모두에게 필요했지만, 이를 생산해 내는 사람은 적었기 때문입니다.

즉, 광산에서 철을 캐 내는 것보다 철을 가공하는 기술을 가진 사람이 더 힘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신라는 이 두 가지 기술을 모두 갖고 있었으므로 많은 양의 철을 생산해서 발달된 도로망을 통해 이웃에 나누어 주었을 것입니다. 물론 그 대가로 곡물 등의 물자를 받아 부유해지고 힘도 강해졌을 것입니다.

신라는 또한 ‘금의 나라’입니다. 금궤 안에서 태어난 김알지는 금을 가공하는 기술자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김알지도 대장장이 출신인 석탈해와 마찬가지로 앞선 기술을 갖고 신라의 발전에 도움이 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기술자 집단이 경주를 찾아 신라의 구성원이 된 것은, 경주가 무엇보다 사람이 살기에 적당한 곳이었기 때문입니다. 앞서 밝혔듯이 황성동 유적에서는 신석기 시대의 빗살무늬 토기와 청동기 시대의 움집 터가 나왔습니다. 이를 통해서 경주가 아주 오랜 역사를 지닌 곳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주변 산은 외부 침입 막아 줘

경주는 북쪽에 북천, 남쪽에는 남천, 서쪽엔 대천과 형산강 등이 풍부한 수량을 자랑하면서 흐르고 있습니다. 또 남산ㆍ토함산ㆍ명활산ㆍ소금강산 등은 경주 중심지를 외부의 침입으로부터 막아 주는 장벽의 역할을 했습니다. 그리고 이 지역의 넓은 평야 또한 예로부터 농사를 짓기에 적합했습니다.

한편, 대구와 경주 사이에 있는 영천 어은동 유적과 경주 사라리 130호 무덤에서 나온 호랑이 모양 허리띠 고리는 모양이 매우 닮아 있습니다.

호랑이 얼굴과 고리에 기하학적 무늬가 새겨져 있고 표현도 매우 사실적입니다. 이 유물은 북쪽 문화를 받아들여 새 문화를 이뤄 가던 사람들이 만든 것입니다.

경상도 지역은 그러나 초기에는 소백 산맥에 가로 막혀 요하ㆍ압록강ㆍ대동강ㆍ한강 주변 지역에서 발전된 고조선 문화의 혜택을 받지 못했습니다.

사라리 130호분. 무덤 아래에 많은 철 덩어리가 놓여져 있다.

그런데 고조선이 멸망하고, 그 유민들이 남쪽으로 이동하면서 영천 등에 머문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이후 이들이 교통이 편리하고 살기 좋은 경주로 와 살게 된 것입니다.

교통망과 풍부한 지하 자원 그리고 좋은 농사 환경, 여기에 앞선 문화를 가진 이들이 정착해 신라를 만들었으니 크게 발전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 되었겠지요? 하지만 초기에는 눈에 띄는 큰 발전을 할 수 없었습니다. 낙동강을 사이에 두고 가야연맹과 마주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김용만(우리역사문화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