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사연재글

2006년 소년한국일보 연재 2 - 신라의 건국

영양대왕 2006. 3. 12. 22:44
[신라 1000년의 비밀] 신라의 건국
알에서 태어난 '혁거세' 최초의 왕위 올라
'삼국유사'·'삼국사기'에 건국 신화 나와…박·석·김 3대 성씨와 6개 촌락 함께 세워


김알지가 태어난 계림 숲.

신라 1000 년은 언제부터 시작된 것일까요?

그에 대한 답은 고려 시대 김부식 등이 쓴 ‘삼국사기’를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신라에 관한 가장 자세한 기록을 남겨 놓고 있기 때문이지요.

이 책 첫머리에는 신라가 세워진 때가 서기 전 57년으로 고구려보다 20 년 빠르다고 적혀 있습니다.

또한 신라를 건국한 박혁거세가 알에서 태어났으며, 그의 부인인 알영 또한 알영정이라는 연못에 있는 닭 모습을 한 용의 오른쪽 옆구리에서 태어났다고 적고 있습니다. 박혁거세와 알영이 정말로 이렇게 태어났을까요?

석탈해의 집이었다가 신라의 왕궁이 된 반월성의 성벽.

알에서 태어났다거나, 용에서 탄생했다는 이야기는 신화입니다. 하지만 신화라고 해서 전혀 의미 없는 황당한 이야기로만 볼 수는 없습니다. 신화는 역사적 사실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과정에서 후세 사람들이 조금 이야기를 보태기도 하고, 더러는 내용이 조금 바뀌면서 만들어진 것입니다.

신화에는 옛 사람들이 세상을 어떻게 이해했는지 알 수 있는 실마리들이 담겨 있습니다. 설명하기가 어려워 신들이 한 일이라고 은근 슬쩍 넘어간 표현이나 지나친 칭찬, 과장에 가까운 부분들을 빼면 신화는 옛 역사를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된답니다. 이처럼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실려 있는 신라 건국 신화는 신라사의 첫머리를 알려 주는 보물 같은 이야기이지요.

‘삼국사기’ 등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신라가 어떻게 건국 됐는지를 알아 보도록 하겠습니다.

지금의 경주 지역에는 고조선이 멸망한 뒤 그 백성들이 남쪽으로 내려와 만든 6 개의 촌락이 있었습니다. 6 개의 촌락은 알천의 양산촌ㆍ돌산의 고허촌ㆍ취산의 진지촌ㆍ무산의 대수촌ㆍ금산의 가리촌ㆍ명활산의 고야촌입니다.

알영정 연못.

이들 6 촌은 촌장을 중심으로 해 각기 독립된 작은 세력에 불과했습니다. 이들 전체를 이끌어 줄 강력한 힘을 가진 왕은 없었지요.

그러던 어느 날, 양산 기슭 나정 숲 사이에서 말이 무릎을 꿇고 우는 신기한 현상이 일어났습니다. 고허촌의 촌장인 소벌공이 이를 확인하기 위해 가 보니 말은 사라지고 큰 알이 남겨져 있었습니다.

이후 알이 깨지고 그 속에서 아이가 나왔는데, 아이는 십여 살 때에 이미 어른 몸이 되었습니다. 그러자 6 부 사람들은 그 아이를 밝게 세상을 다스리는 왕이란 뜻을 가진 ‘혁거세’로 모시게 되었습니다.

혁거세가 다스릴 때의 나라 이름은 서나벌, 또는 서벌ㆍ사로ㆍ사라ㆍ계림 등으로 불렸습니다. 그 뒤 신라란 이름은 지증왕 4년인 503년이 되어서야 통일된 단 하나의 나라 이름으로 불려졌습니다. 혁거세가 처음 나라를 다스릴 때 궁궐은 경주 남산 서북쪽에 있는 지금의 창림사 터에 세워졌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남산 서북쪽에 있던 궁궐은 나중에 남산 북쪽에 있는 반월성으로 옮기게 됩니다. 그런데 반월성의 주인은 석씨의 조상인 석탈해였습니다.

신라는 고구려나 백제와 달리 임금을 배출한 성씨가 3 개나 되었습니다.

박혁거세의 후손이 줄곧 신라의 왕이 된 것이 아니라, 석씨와 김씨도 왕이 되었습니다. 석탈해도 알에서 태어났는데, 지혜가 뛰어나고 재주가 많아 신라 2대 남해차차웅의 사위가 되었고, 마침내 4대 탈해 이사금이 되었습니다.

또 김씨의 시조는 월성 앞에 있는 계림 숲 속의 금궤 안에서 태어난 김알지입니다. 그는 왕이 되지는 못했지만, 후손 가운데 미추가 신라 13대 미추이사금이 된 이후로 김씨가 신라왕을 가장 많이 차지하게 됩니다.

석탈해는 용성국 출신으로 바다를 통해 신라로 들어온 사람입니다.

또 김알지와 박혁거세도 6 촌 사람들보다 뒤늦게 경주 지역으로 이주해 왔습니다. 외부에서 왔지만 기존의 사람들에게 인정 받기 위해 자신들을 알이나 금궤 등에서 태어났다고 조금은 과장할 필요가 있었을 것입니다.

이처럼 신라는 박ㆍ석ㆍ김 3 개 성씨와 고조선의 사람들인 6 촌 사람들이 모여 만든 나라입니다. 이렇게 여러 사람들이 경주 지역으로 모였다는 건 이 지역이 다른 곳과 달리 한 나라를 세우기에 유리한 조건을 가졌기 때문일 것입니다.

무엇이 사람들로 하여금 경주로 모이게 했고, 또 경주가 한 나라의 중심지가 될 수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다음 회에 자세히 알아 보겠습니다.


김용만(우리역사문화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