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의발견-나의생각

고구려사에서 한족(漢族) 도래인과 중원사에서 고구려 도래인

영양대왕 2006. 1. 23. 12:01
고구려사에서 한족(漢族) 도래인과 중원사에서 고구려 도래인
번호 : 23   글쓴이 : 김용만
조회 : 426   스크랩 : 0   날짜 : 2003.11.05 15:04
*** 예전에 고구려 토론방에 썼던 글인데, 이곳에 보관하고 싶어서 다시 인용해 봅니다. *****

고구려사에서 한족(漢族) 도래인과 중원사에서 고구려 도래인
번호:1539 글쓴이: 김용만
날짜:2003/05/10 12:12


제목에서 말한 도래인이란 표현은 그리 적합한 표현은 아닐지도 모른다.

도래인은 바다를 건너서 넘어 온 사람들이라는 뜻으로 주로 일본사에서 한국에서 건너온 사람들을 일컫는 말이 된다. 일본사에서 도래인은 선진문물을 가져다 준 백제, 가야, 신라, 고구려 사람들을 주로 일컫는다.
일본은 도래인으로 말미암아 크게 성장할 수 있었다. 일본인들은 도래인의 역할을 축소해서 보려고 한다. 그래서 한때는 귀화인이라는 표현을 했으나, 이제는 그런 표현을 거의 하지 않는다.

우리는 일본에 건너간 도래인의 역사를 우리 역사로 취급하면서 일본은 옛날 한국의 제자였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일본인들은 어떤가. 한때는 도래인이 문물을 가져다 준 것을 축소해서 보았지만, 지금은 당당히 말한다. 어차피 그들은 결국 일본사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자. 이제 이런 시각을 고구려와 중원의 역사로 좀 돌려보자.
고구려에도 많은 사람들이 넘어왔다. ("고구려의 그 많던 수레는 다 어디로 갔을까"의 2장 '고구려는 단일민족 국가가 아니었다'부분을 참고 바랍니다.) 韓, 濊, 부여, 백제, 신라, 거란, 말갈, 실위 등등 많은 족속들이 자발적이든, 비자발적이든 고구려의 바다에 빠져서 함께 살았다.

그런데 이런 문제는 쉽게 넘어가면서 특이하게도 우리는 漢族의 문제에 대해서는 좀 다른 시각을 갖고 있는 것 같다. 을지문덕이 혹여 당나라 장군인 울(위)지경덕과 같은 성씨가 아닐까, 혹은 강이식이 한족출신인데 넘어온 것은 아닐까 라는 말을 하면서 그 자리에서 화를 내며 에이 나쁜 놈이라면서 욕을 한다. 물론 을지문덕이나 강이식이 족보가 전해지지 않는다고 그들이 다른 나라 출신이라고 볼 근거는 거의 없다.

하지만 좀 문제를 달리해서 안악3호분의 주인공이 선비족인 동수라거나, 덕흥리고분의 주인공 진 이 고구려출신이 아니라는 주장은 학계에서도 상당부분 수긍하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그런 주장 자체가 왠지 우리나라에서는 그리 자랑스런 연구가 아닌 것처럼 비추어진다. 왜 그럴까. 이것은 마치 일본이 도래인을 한때 귀화인이라고 불렀던 것과 같은 현상이다.

한족을 비롯한 중원지역에서 고구려로 넘어온 사람들을 우리는 무엇이라고 부를까. 일본사에 기준으로 한다면 그들은 도래인(실제로 바다를 건너온 인간들도 많았고, 그래 요하, 만리장성을 넘어 온 인간들이니 만큼 이 용어도 과히 틀리는 것은 아닐 것이다.)이라고 잠정적으로 부르자.

그들 도래인은 고구려사에서 큰 역할을 한 것은 사실이다. 왕고덕, 왕산악 등 왕씨는 고조선계 유민일 가능성도 있지만, 한족일 가능성도 있다. 온달도 신라인인 온군해와 같이 토착 성씨일 가능성도 있지만, 중원계 성씨일 가능성도 있다. 좀 심했다고, 아니다 그래도 문제될 것이 없다.

고구려 후기사에서 중국계 인물은 의외로 많을 수 있다. 고구려는 한족 출신이라고 해서 차별을 두지 않았다. 예를 들어 조양지역을 다스리던 북위의 한기의 아버지 한상(평주사마 자의참군 이었음) 이란 자를 잡아왔는데, 그를 대사자로 임명했던 일이 있다. (520년대 한기묘지명 참조)
또 안악3호분이 미천왕릉이라고 하더라도 선비족인 동수를 왕릉에 함께 배장할 만큼 동수를 중용했던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러한 고구려의 분위기라면 충분히 도래인들이 고구려에서 성장할 수 있다.

한족, 선비족 등 외래 종족들이 와서 고구려의 고위관리가 되고 문물을 전해 준 것이 고구려사에서는 어떤 의미일까.
그것은 고구려사를 더욱 풍부하게 만들고 고구려를 강한 나라로 만든 힘이었다. 한족 도래인을 나는 당연히 고구려인으로 생각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그들을 터부시하고 굳이 혈통이 한족이 아니라고 부인할 필요도 없다.

이렇게 부인하는 것 자체가 우리가 갖는 일종의 컴플렉스의 발로이기 때문이다. 고구려가 도래인을 포용했다는 자체는 고구려의 자랑이 아닐까. 생각을 바꾸어 보면 고구려가 강국이 된 힘은 배타적인 혈통주의만을 강조한 것이 아니라, 재능있는 여러 종족들을 받아들여 활용했기 때문이 안닌가. 일본이 무지했던 과거를 가졌지만, 오늘날 크게 발전했던 것은 외래의 문물을 잘 흡수했기 때문이 아닌가. 마찬가지다. 고구려도 그랬다. 그것이 고구려의 장점으로 보자.

꺼구로 보자. 중원의 역사에서도 고구려 도래인, 부여 도래인은 엄청나게 많았다. 북위 왕실의 외척이 된 고조, 북주의 10주 도독제군사에 임명된 고림, 수나라 최고의 재상 고경, 북연의 왕 고운 등등 이들을 어떻게 볼까. 우리는 희안하게도 일본에 도래한 사람들에 대해서는 엄청나게 연구를 하면서 이들에 대해서는 거의 관심을 갖지 않고 있다.

왜 그럴까. 나는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겨우 서병국 교수의 논문 1편과 내가 "고구려의 발견"에 쓴 내용 정도가 그나마 좀 언급한 것이다. 이것에 눈을 돌리지 않은 것은 우리의 적극적 시각이 결여된 탓도 있고, 중국인들이 갖는 컴플렉스의 발로도 한 몫 했던 것도 사실이다. 중국이란 상대를 지나치게 확대해보고, 일본은 은근히 무시하는 한국의 잘못된 편견이 동아시아 역사를 잘못 보게 하고 있고, 동아시아 역사를 세계사로 기술하지 못하고, 나누어진 각국사로만 기술하게 만들고 있다.

우리는 이들 고구려 도래인이 어떻게 중원의 왕조들 틈에서 정착할 수 있었고, 어떻게 권력을 잡을 수 있었는지 하는 문제에 대해서 좀 심각하게 연구할 필요가 있다. 그래야만 균형잡힌 동아시아 역사를 제대로 좀 규명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동아시아 역사는 처음부터 한, 중, 일 3국의 역사로 나누어진 것이 아니다. 적어도 서로 많은 교류와 왕래를 통해 서로 피가 섞이기도 했다. 그런데 우리는 고려-조선을 거치면서 지나칠 정도로 우리 자신들의 안목을 중국과 한국, 대륙과 한반도 이런 식의 2분법으로 나누어 보고, 왠지 모를 피해의식 속에서 남아있는 우리것 만큼은 결코 남에게 빼앗기지 않겠다는 소극적이고 방어적인 역사인식을 갖게 되었다.

이제는 좀 방어적이고 소극적인 역사인식에서 벗어나서 개방적이고 포용적인 역사인식을 가져보자. 개방적이고 포용적인 역사인식을 가져야 동아시아 세계사가 제대로 기술하고, 이해될 수 있지, 지금처럼 한, 중, 일 3국사로 나누어 보고 중국문화의 일방적 낙차적 흐름속에서 한국, 일본이 성장했다는 인식은 진실로 잘못된 역사인식이다. 이것은 20세기초 일본의 동양사학계가 만들어내고, 20세기말 중국사학계에서 더욱 확대시킨 설일 뿐이다.

나는 4-6세기 남북조사를 호한체제로 해석하는 박한제 교수의 개념을 중국사가 아닌 동아시아 역사 전체로 확장시킬 것을 제안해본다.
문화의 중심은 언제나 변함이 없는 것이 아니다. 20세기 동아시아의 문화의 중심은 중국이 아닌 일본의 동경이었다. 물론 21세기는 상해나 북경이 될 가능성이 크기는 하지만, 서울일 가능성도 열려져 있다.

나는 5세기 중엽부터 6세기 중엽의 동아시아의 문명의 중심은 고구려라는 생각을 갖고 있다. 물론 기원전후 시기에 동아시아 문명의 중심은 당연히 중원의 낙양과 장안임은 결코 잊지 않는다. 문화가 상대적이고 역사가 늘 변한다는 인식을 갖는다면 우리는 한국사에 갖고 있는 컴플렉스를 벗어던 질 수가 있을 것이다.

현재의 폐쇄적이고 소극적인 역사인식이 도리어 고구려를 제대로 판단하는데 장애가 되고 있다고 나는 판단하고 있다.

나는 5-6세기 동아시아 역사 특히 고구려와 중원국가 간의 역사를 파헤치기 위해서 이제 내 연구의 중심을 그리로 돌리려고 한다.
그것은 7세기 연개소문과 고-당 전쟁을 어느 정도 종료된 지금 시점에서 내 연구의 다음 지향점이기 때문이다.

나는 몇년의 시간을 투자하여 고구려사를 동아시아 역사에서 새롭게 자리매김을 해보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