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의발견-나의생각

역사학은 어떤 성격과 기능을 가진 학문이어야 하는가?

영양대왕 2006. 1. 23. 11:57
역사학은 어떤 성격과 기능을 가진 학문이어야 하는가?
번호 : 21   글쓴이 : 김용만
조회 : 178   스크랩 : 0   날짜 : 2003.07.30 18:26
역사학은 어떤 성격과 기능을 가진 학문이어야 하는가?

역사학은 순수학문인가, 아닌가.
역사학은 어떤 사회적 기능을 담당해야 하는가.
역사학은 대체 어떤 성격의 학문인가.
역사학은 현시대에 어떤 기능들을 수행해야 하는가.
역사교육은 어떤 것을 목표로 이루어져야 하는가.

한국 역사학계의 가장 당면한 과제 가운데 하나는 이러한 가장 기본적인 역사학의 성격과 기능을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에 있다.

이 문제에 대해서 학자들은 고민을 하지 않은 것도 아니고, 수 없이 고민을 해왔고, 또 앞으로도 해야 할 것이다.

나는 역사학을 순수학문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역사학은 장기적 의미의 정치학이라는 말을 자주 사용해왔다. 역사학은 시대의 요구를 반영해야만 한다. 시대의 요구를 적극 반영하는 순간 역사학은 현실학문이되며, 순수학문과는 다소 차이가 날 수 밖에 없다.

학문의 순수성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과거 원자폭탄을 만든 물리학자들을 비판한 하이젠베르그처럼 학문의 순수학문을 지켜야 한다고 말하고 싶어 할 것이다.
하지만 1940년대 세계 물리학이 처한 상황과 원자폭탄과 현재의 한국 상황과 역사학의 기능은 분명히 다르다. 우리의 역사학은 원자폭탄이나 군국주의로 나가자는 학문은 아니다.

한국의 역사학은 현재 우리의 현실을 타개하는데 최소한의 도움이라도 주는 역할을 제대로 하고 있을까? 책을 통해, 또는 학교 교육이나 대중 강좌 등을 통해 역사가 하고 있는 기능은 대체 무엇일까? 도대체 대학에서 역사학을 전공해서 어디에 써 먹을 것인데 라고 묻는다면 뭐라고 답할 것인가?

그저 학문하는 즐거움이라고만 한다면, 굳이 많은 역사 관련학과에서 수많은 학생들을 배출할 필요도 없다. 그저 몇몇 학자들의 마스터베이션으로 끝나는 학문이라면, 그런 학문은 소수만 하면 된다. 역사학자들이 이런 생각을 갖고 있기 때문에 역사 관련학과는 계속해서 대학에서 축소되고 있다. 현실에 아무런 기여도 못하는 학문을 왜 가르친단 말인가.

순수학문이 현실학문에 대해서 우려하는 것은 학문의 잘못된 이용이다. 간혹 독재자를 위한 명분 만들어주기, 잘못된 정책을 지원하기 위한 학문적 뒷받침 등에 역사학이 사용된 사례는 인류 역사상 수없이 많았다. 하지만 지레 역사학이 잘못 사용될 우려를 하여 순수학문으로 역사학이 남아야만 한다고 말하는 것은 “구더기 무서워서 장 못 담근다.”는 식이다.

단재 사학을 생각해보자. 일제하에서 단재 신채호의 역사학이 가졌던 공적을 비난하는 사람들은 없을 것이다. 신채호, 박은식 등의 역사학은 독립운동을 위한 학문이었습니다. 독립운동의 정신적 무기로서의 역사학.
하지만 지금은 그런 시대가 아니라면서 단재 사학은 더 이상 생명력을 가질 수 없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단재 사학과 같이 목적을 가진 역사학은 지금 생명을 다했는가.

그것은 현실 인식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적어도 역사학이 적극적 기능을 할 필요가 없을 시대라면, 그것은 현 시대가 매우 안정된 시대이어야 한다. 평화와 번영, 그리고 국가내부의 갈등이나, 민족의 갈등도 없는 시대라면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현재 우리는 국가적, 민족적 과제를 안고 있다.
냉정하게 말해 현재는 분단시대며, 정전체제다. 다시 말해 전쟁을 하다가 잠시 중단된 상태, 통일을 하기 위해 잠깐 멈추어 서 있는 상태다.
만약 현재의 시간이 지속만 된다면 우리는 세계 유일의 분단국을 유지할 뿐만 아니라, 주변의 4강의 다툼 속에서 계속 눈치만 보면서 소국의 비애감을 느끼면서 계속 살아야 할 것이다.

우리가 영원히 주변 4강을 넘을 수 없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최소한 남과 북이 통일되어 주위 4강의 눈치를 덜 보는 진정한 자주국은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현재 우리나라와 민족의 상황은 안정된 시기가 아니라, 매우 비정상적인 상황이다.
현재 우리겨레에는 남북한 합쳐 7천만의 동포가 있고, 해외에도 약 700만의 동포가 있다. 이스라엘을 제외하고 우리처럼 인구대비 동포의 비율이 높은 나라는 별로 없다.
이 가운데 자발적으로 이주하고, 또 입출국이 비교적 자유로운 미국과 캐나다 등의 동포는 별 문제가 없지만, 재일동포, 재중동포, 재러시아 및 중앙아시아 동포는 상황이 다르다. 특히 연변의 동포들은 독립운동을 하던 후손들의 자손이 상당수며, 반드시 우리와 합쳐야 할 존재들이다.

일부에서는 만주족도 우리 겨레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지나친 비약이며 서로의 동질감도 없다. 하지만 동질감을 갖고 언어와 풍습이 같은 연변 동포들과의 분리 상황을 영원히 지속하게 해서는 안 된다.
남과 북이 통일되어 중국, 러시아 등으로부터 조차를 받는, 아니면 그들의 자유로운 입국을 통하든, 아니면 땅을 어떤 식으로든 회복하여 같은 테두리 안에 같은 민족이 자유롭게 입국과 출국, 국적 취득 등이 자유로워져야만 민족의 상태가 안정적이 될 것이다.

나는 현재의 우리상황이 만족스럽지 않다.
현재 상황이 영원히 지속해야 할 상황이라면, 현재에 만족하고 우리 국가의 운명도 지금처럼만 지내면 된다고 생각한다면, 역사에서 굳이 교훈을 얻어야 할 필요성도 없을 것이다.
나와 달리 현재가 영원히 지속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현재 상황에서 충분한 부와 행복을 누리고 있는데, 괜히 통일해보았자 북한의 거지들이 내려오면 시끄럽고, 또 통일분단금 내려면 세금을 내야 하니까 통일하지 않았으면 할 수도 있겠다. 그것이 일반인들이 그렇게 말하는 것은 그냥 넘어갈 수 있지만, 역사를 배운 자가 그렇게 말한다면 나는 반드시 비판을 해야하겠다.

역사는 시간을 배우는 학문이다.
시간은 모든 것을 변화시킨다. 그래서 미래를 생각하게 하는 것이 옛 역사를 배우는 목적이 되는 것이다.

지금 이라크와 터키, 이란 등에 흩어져 있는 쿠르드족에게 있어서 역사란 무엇일까. 그들에게는 역사란 자신들의 자존을 위한 최후의 보루다.

우리가 만약 역사를 버린다면, 역사의 현실적 기능을 도외시한다면, 그래서 속지주의로만 가서 연변은 우리 나라 국경안에 있지 않으니까, 그들은 우리와 분리된 것이라고만 가르친다면 한국어를 사용하고 한국풍습을 갖고 친척과 형제 자매의 끈이 아직도 남아있는 연변 동포들은 영원히 남의 나라사람으로 내 팽개치는 것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고대사에서 이정기나 고선지를 언급할 아무런 이유도 없을 것이다.
고선지를 언급하면서 왜 연변 동포에 대한 동질 의식을 부여하는 역사는 가르치지 않을까.
미국에서 한 고교생이 미국육사에 합격했다는 기사는 신문보도가 되면서, 왜 연변자치주의 한국인 수장의 이름은 한번도 신문보도가 되지 않는가. 이것이 제대로 된 민족에 대한 정책인가.

지금 우리는 통일의 역사학을 해야만 한다. 분단 시대를 극복하고 통일 시대를 맞이하기 위한 통일의 역사학, 그리고 한국의 미래비젼을 제시할 수 있는 역사관을 만들어야 한다.

그리고 중국과 일본의 국가주의 역사관에 대항할 한국의 역사관을 만들어야 한다.
중국과 일본은 역사 침략을 지금도 지속하는데, 우리만 양반임네, 도덕군자임네 하면서 역사는 순수학문이니까, 우리만 나 몰라라 한다는 것은 과거 말로만 북벌하던 송시열과 말로만 싸우자던 인조 같은 쓰레기와 뭐 다를게 있을까.

** 잠깐 지나가는 비평 - 혹 내 글을 인용할 때는 이 부분은 빼주시기를 부탁함.
(그래 발해는 지금 중국의 영토니까, 중국사로 변입하는 것은 당연해.
하지만 발해의 영토는 지금 우리가 갖고 있지 않는데, 왜 우리 역사에 편입시켜야 하는지 모르겠다. 그 바람에 신라사가 폄하되고 있으니, 빨리 발해사를 없애자. 이렇게 주장하는 A라는 학자가 있다.
나는 묻겠다. 그렇다면 A 당신은 북한은 남의 나라이며, 앞으로도 우리와 만나지 말자는 이야기 인가. A 당신은 우리가 발해 영토를 차지하면 발해사를 한국사에 포함시켜야 한다고 했다. 그렇다면 북한은 발해사를 배우고, 우리는 배우지 말자는 이야기가 인가?

A같은 사람은 통일이건 분단이건 머리 속에 생각해본 적도 없이 그저 자기 밥그릇과 자기의 역사권력을 강화시키는데 혈안이 되었겠지만, 그의 잘못된 한마디는 분단을 더욱 고착시킨다. 그러면서 A 당신은 한국 역사학이 세계 역사학계에 당당히 나가야한다고 말을 한다. 그럼 우리가 영원히 분단된 체 지금 한반도 남단의 역사로 굳어진 과정에 대한 역사만을 배우자는 말이냐.)

현재 한국사는 민족사, 한국사일 수밖에 없다. 만약 자라나는 학생들에게 우리의 정체성, 우리가 누구이며 어떻게 성장해온 사람이라는 것을 가르치지 않는 역사학이라면 대체 뭐하는 역사학일까. 그냥 옛날이야기로 끝나는 역사학이라면 굳이 배울 필요도 없다.

우리는 통일 역사학을 말해야 하고, 한국인의 자부심과 긍지, 그리고 교훈을 주고, 경험의 보물창고가 되는 역사학을 배워야 한다. 또한 문화컨텐츠 산업이 근본 재료학로서 역사학이 갖는 소임도 충실히 해야 한다.

나는 통일을 위한 역사학이 과거 박정희가 말한 국가주의 역사학과는 다르다고 말할 수 있다. 국가주의도 독재가 개인이 잘못 활용해서 문제이지, 전 세계 어느나라나 다 국가주의적 사고와 행동을 하고 있다. 월드컵에서 왜 수백만의 인파가 광장에 모여서 고함을 치고 흥분을 했을까. 국가라는 틀이 없었다면 그런 고함과 감동도 없었을 것이다.

국가를 떠난 개인으로 살 수 있는 사람들에게 국가는 큰 의미가 없을지도 모른다. 지금은 그런 세계인이 많이 탄생된 시대다. 하지만 국가가 지켜주고 보호해주어야 할 대다수의 사람들에게는 무능한 국가, 가난한 국가는 개인의 불행을 가져오게 한다.

우리는 통일을 해야 한다. 그래야 국가가 강해질 수 있고, 개인의 불행을 조금이라도 줄일 수 있고, 미래의 후손들에게 덜 불행한 역사를 남겨줄 수 있다.

통일에 역사학은 반드시 기여해야 한다. 역사는 지난 시절을 통해 오늘의 우리를 배우는 것이다. 강만길 선생님이 쓰신 <분단시대의 역사학>과 <역사를 위하여>를 읽으면 왜 역사학이 오늘에 필요한 지를 절감할 수 있을 것이다.

현재 한국의 역사학은 아직 일제시대와 큰 차이가 없는 상황에서 너무 빨리 현실적 기능을 저버리고 있다. 식민사학 논쟁이 아직도 문제가 되는 것도 바로 역사학이 현실문제에 너무 도외시했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전 세계는 자국의 역사를 국가와 민족의 이익을 위해 역사를 활용한다. 그 과정에서 역사 침략과 왜곡도 서슴치 않는다. 그런데 우리만 언제까지 조선시대 선비인냥 팔짱끼고 있어야 하는가.

외국의 국가주의 역사관에 대처할 우리의 역사관을 빨리 정립해야 하지 않겠는가. 무엇보다 남과 북이 먼저 역사 연구에 있어서 만큼은 의견일치를 봐야 하지 않겠는가. 그래야 중국과 일본, 러시아의 역사침략에 대항할 수 있지 않겠는가.

역사학자들이 갖는 피해의식, 역사가 잘못 활용되어 독재자의 주구가 될 것을 우려하는 것을 모르는 바가 아니지만, 실제로 그런 우려를 하면서 현실에 소극적이었던 사람들이 권력자로부터 부름을 받자 도리어 정권의 시녀가 되었던 경험은 어찌 설명할 것인가.

나는 역사학이 갖는 적극적 기능을 찾아야 한다고 본다.

역사학에는 많은 분과들이 있다. 예를 들어 경영사학. 그런데 경영사학은 겨우 연구하는 것이 유명 기업의 창업자에 대한 경영에 대한 분석과 찬양에 그친다. 진짜 역사학이라면 우리 역사를 통해 기업 경영의 모델을 제시하고, 국가 운영의 비교 가능한 모델이나 경험들을 전해주는 진정한 거울의 역할을 해야 하지 않겠는가.

국사편찬위원장이라면 대통령과 정부, 국회, 사법부, 군의 주요 인사, 언론사 사장단, 거대 기업의 총수들 앞에서 경연의 장소를 마련하여 옛 역사가 이러했으니, 오늘의 우리는 이렇게 해야 하지 않겠느냐며 일갈을 할 정도는 되야 않겠는가.

역사학이 태동한 이후로 오늘날처럼 역사학이 아무런 역할을 못하는 시대는 그리 많지 않았을 것이다. 역사학은 스스로 위상을 찾아야 한다.
문화사관으로 가서 문화컨텐츠의 기초산업의 역할을 하든, 아니면 국가지도층에 일갈하는 교훈사관으로 가든, 통일의 이론적 기초를 제공하며 국민정신을 고양하는 학문으로 가든 분명 지금보다는 적극적으로 그 역할을 확대할 필요가 있다.

발해사를 하는 한규철 교수는 한-중 간에 역사전쟁이란 말을 사용했다.
그의 말을 들으면 역사를 공부한다는 것이 그냥 밥벌이나 취미일 수 만은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일부 순수학문논자들이 역사의 의미를 부여하고자 하는 것은 현재의 희망을 과거에 투영하여 역사를 만들어 간다고 비난한다. 맞다. 역사는 만들어진다. 역사는 그래서 시대 시대마다 보는 내용이 틀리고, 강조하는 것도 다르다.

크로체라는 역사가가 말한 “모든 역사는 현재의 역사다.”는 말을 떠올려 보자.

문제는 현재의 시각이 얼마나 균형 잡힌 시각이냐가 문제일 뿐, 역사를 적극 활용하기 위한 노력은 역사가의 당연한 행동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