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의발견-나의생각

『새로 쓰는 연개소문전』 서문

영양대왕 2006. 1. 23. 12:00
『새로 쓰는 연개소문전』 서문
번호 : 22   글쓴이 : 김용만
조회 : 348   스크랩 : 0   날짜 : 2003.10.21 11:31
신화에서 역사로
새로 쓰는 연개소문전

연개소문.
그는 아직 우리에게 역사가 아니라 신화다.

한국사 전체를 통틀어 수많은 영웅들이 나타나고 사라졌지만, 연개소문처럼 그 이름에 비해 실체가 안개에 가려진 인물도 드물다. 그런데 연개소문은 김부식의 『삼국사기』 에서는 임금을 죽인 역적으로, 신채호의 『조선상고사』에서는 위대한 혁명가로, 박은식의 『천개소문전』에서는 독립자주의 정신과 대외경쟁의 담략을 지닌 우리 역사상 제1인자로 극단적으로 다른 평가를 받는다.

연개소문은 당시 왕이었던 영류왕을 한 칼에 베어버리고 그의 시신을 시궁창에 차버리고 권력을 장악했다. 그 때문에 조선의 유생들에게는 불충의 상징처럼 각인되기도 했다. 반면 수십년에 걸친 고-당 전쟁을 승리로 이끌며 고구려의 힘을 보여준 연개소문은 당나라 사람들에게는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그 때문에 <독목관>, <살사문> 등 현대까지 전해오는 중국의 경극에서는 그가 당태종 이세민을 벌벌 떨게 만드는 무서운 고구려의 장군으로 등장한다.

한 인물에 대한 역사적 평가가 시간과 공간적 조건에 제한을 받는 것은 어쩔 수 없다고 하더라도, 지금도 남북한과 중국 등에서 연개소문에 대한 평가는 지나칠 정도로 극과 극을 달린다.

다채로운 평가에도 불구하고, 도리어 그의 실체는 제대로 밝혀진 것이 없다. 알려진 것이 적기 때문에, 신화 속 인물이기 때문에 그에 대한 오해도 많고, 과장된 평가도 많았던 것이다. 그가 신화 안에 남아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그에 대한 기록이 절대적으로 부족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가 살던 7세기 고구려와 주변 상황에 대한 기록의 대부분이 연개소문과 고구려의 적이었던 당나라의 후예들이 남긴 것이라는 점도 중요한 원인이다.#1

고구려의 운명은 물론, 7세기 이후 동아시아 역사의 흐름마저 바꾸어놓은 고-당 전쟁은 이 사건의 중심인물인 연개소문을 빼놓고는 말할 수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대사건에 대해서는 기초적인 전쟁 상황조차 잘못 알려져 있고, 깊이 있는 연구조차 드물다. 그에 대한 평가를 하기보다는 먼저 그가 살았던 시대와 그의 행적, 그리고 그의 고뇌를 먼저 살피는 것이 순서이어야 하지 않을까.

남아있는 기록들이 모두 진실을 밝혀놓은 것은 아니다.

어떤 입장에서 기록되었느냐에 따라 일방적인 주장과 왜곡된 정보가 진실처럼 믿어지는 경우는 너무도 흔하다. 특히 역사적 사건의 경우는 패배한 자에 대한 정보가 왜곡되고, 승자의 입장만이 부각된 기록들로 재구성되어 진실과 동떨어지게 알려진 것이 많다. 또한 후대의 특정한 편견으로 인해 진실이 왜곡되기도 한다.

중국이 자랑하는 성군이라는 당 태종 이세민에게 치욕을 안긴 연개소문이었기에 중국 측 기록들은 그를 큰 악당이거나, 주인공 이세민의 들러리나 서는 생각 없이 존재하는 역사의 객체로만 묘사했다. 편견이 가미된 일방의 기록에 의지하여 역사를 이해한다면 우리는 고구려를 고구려로, 연개소문을 연개소문으로 보지 못하게 된다.

연개소문은 임금을 죽이고 권력을 쟁취한 독재자였다.

우리는 살육을 자행하며 권력을 쟁취한 인간들의 대다수가 개인의 사욕을 위해 일을 저질렀음을 알고 있기에, 연개소문에 대한 부정적 선입견을 가질 수도 있다. 하지만 연개소문은 분명한 목표를 갖고 있었고, 권력을 쟁취한 후에도 당당했다. 부족한 정통성을 메우기 위해 강한 외세에게 자신의 정권을 인정해달라고 아부하며 국익을 저버리는 자들과는 근본적으로 달랐다. 그는 세계 최강이라고 자타가 공인하던 당나라를 상대로 당당한 대국 고구려를 지켜내기 위해 전쟁을 거부하지 않았고, 전쟁에서 큰 승리를 일궈냈다.

그는 강한 카리스마의 소유자답게 단호한 결단력을 가졌지만, 치밀한 전략가이기도 했다. 그는 병법에도 능했다. 하지만 그 혼자의 힘으로 당나라를 이길 수는 없었다. 그는 무엇보다 수없는 고뇌와 갈등을 할 수밖에 없는 고구려의 지도자였다.

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남아있는 기록들을 읽으면서 근본적인 물음부터 제기 해보아야 한다.

연개소문과 고구려 사람들은 왜, 무엇을 위해서 당나라와 전쟁을 했던 것일까? 왜 그렇게 수십 년간 굴하지 않고 전쟁을 했던 것인가? 고구려는 대체 무슨 힘과 전략으로 최강이라던 당나라군을 거듭 격파할 수 있었던 것일까?

중국학자들이 주장하는 견해에 따라 고구려가 당나라의 지방정권이며, 당나라에게 아무런 위협도 되지 못하는 약소국이었다면 굳이 당나라가 온 국력을 기울여 싸웠어야 할 필요성이 있었을까? 당나라는 대체 어떤 이익을 얻으려고 그토록 고구려와의 전쟁에 집착했던 것일까? 불과 수십 년 전 수 백만의 대군을 동원하고서도 고구려를 굴복시키기는커녕 비참한 패배를 당한 수나라의 경험을 알고 있었음에도 당태종 이세민은 왜 고구려 공격을 끝없이 갈구했던 것일까? 기록만으로 살피면 당나라는 큰 승리를 거둔 것처럼 보이지만, 이세민은 전쟁 패배를 크게 후회했다. 대체 전쟁 상황이 어떠했기에 중국 측 기록들은 전쟁의 진실을 감추고자 했던 것인가?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대패를 당했다면 더 이상 전쟁을 하지 말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이세민의 아들 당 고종 이치는 고구려와 지속적인 전쟁을 시도했다. 결국 당나라는 고구려를 멸망시키는데 성공했지만, 과대팽창으로 인한 국력손실로 돌궐과 토번의 부흥을 막지 못해 이후 점차 쇠퇴하기 시작했다. 단순한 경제적, 군사적 이익만으로 양국이 전쟁을 한 이유를 설명할 수는 없다.

팽창주의를 내세운 당나라는 고구려를 반드시 제압하여 단일화된 동아시아 세계를 만들고자 했다. 새롭게 부상하는 신흥 대국 당나라는 노회한 대국 고구려에 비해 인구, 영토, 문화의 폭, 제도 등 모든 면에서 분명 한 수 위였다. 연개소문은 강적 당나라의 팽창야욕을 막아내기 위해 많은 고뇌를 해야 했다. 강한 적 앞에서 비굴한 모습을 보이는 나약한 인간들을 설득하고, 때로는 제거하기도 하면서 그는 당당한 대국 고구려를 지켜냈다. 그는 외로웠고 힘에 겨웠다. 물론 당나라에게도 고구려와 연개소문은 너무나도 힘겨운 상대였다.

필자는 남아 있는 기록들에서 조연에 머물러 있던 연개소문과 고구려를 역사의 주연으로 끌어 올려야 했다. 중국 측 사료에서 고구려의 입장이 반영이 되어 있지 않다면, 상대적 관점에 서서 고구려라면 어떻게 했을까를 생각해 보았다. 당나라의 행동에 이상이 있다면 그 이상의 원인도 찾아보고, 주변 학문에서 분석의 도구도 빌려와 개개 사건들을 다시 분석해 보았다. 중국측 사료가 가진 문제점의 하나인 주변 종족(夷族)에 대한 편견을 제거하고, 사료간의 유기적 연관성도 고려하여 당시 상황을 재구성해 보았다.#2

이렇게 함으로써 필자는 연개소문을 신화의 숲에서 꺼내어 넓은 역사의 들판으로 끌어내고자 했다. 과장된 영웅 연개소문이 아니라, 고뇌하고 힘들어하던 인간 연개소문을 필자는 만날 수 있었다. 그는 끝내 그가 꿈꾸던 세상을 이루어내지 못했다. 시대 환경은 그에게 우호적이지 못했고, 그 역시 많은 점에서 실수와 잘못을 저질렀다.

그는 완벽한 영웅이 아니라, 너무나 부족함이 많은 인간이다. 그 때문에 필자는 그가 사랑스럽다. 우리와 같은 고민을 하며 치열한 삶의 살았던 연개소문의 삶의 경험은 우리에게도 소중한 경험의 보물창고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자유롭고 당당한 삶을 영유하기 위해서는 얼마나 치열한 노력이 필요한가를 고구려와 연개소문을 통해 되새겨 보았으면 한다.

실체를 먼저 파악하지도 않고 드러난 결과에만 집착하여 평가에만 급급했던 우리의 경박함에 필자의 이번 작업이 조그마한 경종이 되기를 바라며, 역사를 상대적 입장에 서서 보지 못하고 그저 기록된 것만을 아무런 비판과 분석도 없이 앵무새처럼 반복하는 어리석은 연구들도 부디 사라지기를 기대해본다.


1) 고구려는 당나라와 3차례에 걸쳐 큰 전쟁을 하여, 1차, 2차 전쟁에서는 승리를 거두었지만, 최종 3차 전쟁의 결과 멸망당했기 때문에 고구려의 입장에서 기록된 자료들을 제대로 남길 수가 없었다. 『삼국사기』가 있기는 하지만, 『삼국사기』의 저자 김부식이 스스로 밝혔듯이 당시 전쟁 상황을 알려주는 기록의 대부분은 당나라의 입장이 반영된 기록을 다시 옮긴 것에 불과했다. 김부식은 당나라가 자신들을 위하여 수치스런 패배를 감춘 것을 비난하고, 사료의 편중을 아쉬워했다.

2) 한국사나 스텝지역의 역사와 같이 자체의 역사서가 부족한 지역의 역사는 이웃한 중국 측의 기록에 상당부분 의존하여 연구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중국 측 기록은 중국인들이 가진 이족(夷族)에 대한 적개심과 편견이 반영되어 있으며, 유교사상에 의한 해석이 부여된 것들이 많다. 따라서 중국 측 자료에 기술된 이 지역의 역사는 저들의 편견으로 얼룩진 역사상에 의해 심하게 변모되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구자들은 이러한 중국 측 자료의 문제점이 있음을 인정하면서도, 남아있는 자료가 부족하다 보니 그 자료들을 액면 그대로 믿는 잘못을 범하기 쉽다. 이러한 문제들을 이 지역 역사연구의 독특한 “역사학의 병증” 즉 중국병(中國病)이라고도 한다.
룩관텐 저, 송기중 역, 『유목민족제국사』, 민음사, 1988, p433~434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