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의발견-나의생각

역사 진화론의 관점에서 벗어나자.

영양대왕 2006. 1. 23. 11:55
역사 진화론의 관점에서 벗어나자.
번호 : 19   글쓴이 : 김용만
조회 : 221   스크랩 : 0   날짜 : 2002.11.18 19:52
역사는 발전하는가?
한국 역사학계는 역사는 발전한다고 믿고 있다. 역사학자들간에 큰 논쟁거리인 시대구분론도 결과적으로 역사의 발전과정을 설명하자는 것이고, 그것이 곧 역사 연구의 목적이라고도 말한다. 역사가 꾸준히 발전했음을 밝혀 앞으로의 인류의 미래도 발전할 것임을 알려주는 것이 역사학의 목적이라는 것이다.
역사의 발전. 이것은 두말 할 것도 없이 다아윈의 진화론에서 비롯된 것이다. 1859년 다아윈은 『종의 기원』의 발표하여 진화론을 처음 제기했다. 인간이 원숭이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으로 다아윈의 주장이 오인되면서 처음에는 종교계를 비롯한 여러 사람들로부터 따까운 비판을 받았다. 하지만, 다아윈의 진화론은 스펜서의 『사회진화론』등에 영향을 미침에 따라 단순한 생물학 이론이 아니라, 제국주의의 이론적 바탕으로 발전했다. 즉 보다 진화한 백인들이 덜 진화된 미개한 흑인과 동양인을 지배하는 것은 적자생존의 법칙에 맞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이다. 이것은 곧 역사학에도 영향을 미쳤다. 서양이 발전한 것은 그들이 가장 진화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역사학에 두드러진 인물로는 헤겔을 들 수 있겠다. 헤겔은 역사의 발전과정에서 게르만의 역사가 가장 정점에 와있다는 것을 예로 듦으로써 독일제국의 탄생을 이론적으로 도와주었다.
무엇보다 역사를 진화하는 것으로 본 대표적인 인물은 맑스와 엥겔스다. 맑스의 유물사관이라고 말하지만, 그것을 완성한 것은 엥겔스다. 맑스는 유물사관의 이론체계로 민족 개념을 정의하였는데, 그 이전단계인 원시공산사회와 노예제 사회의 공동체적 존재형태에 대해서는 제대로 풀어내지 못했다. 그것을 풀어낸 이가 엥겔스로 그의 『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은 고대사 연구와 고고학 연구에 이론적 기반을 확고하게 마련했다고 해도 틀린 것이 아니다.
오늘날 문헌사학을 뒷바팀해주는 고고학이 실증사학에 중요한 무기처럼 사용되고 있지만, 고고학의 이론적 기초는 바로 엥겔스의 유물사관이라고 할 수 있다. 이성적이지 않는 것은 모두 비이성적인 것으로 여기고 감옥과 정신병원을 만들 것에 대해 비판한 미셀 푸코와 같이 실증사학은 진화론적이지 않은 것은 모두 이해할 수 없는 것이라 여기고 덮어버리기 일수다. 때문에 알렉산드리아의 대도서관이나 트로이문명 등의 이야기는 모두 있을 수 없는 일로 치부되었던 것이 사실이다.
역사는 흥망성쇠를 거듭한다고 믿는 동양사학의 전통에 익숙했던 우리들에게도 서양의 진화론에 바탕을 둔 역사학이 도입되면서 역사란 무조건 발전지향적이었던 것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강하다. 구석기 - 신석기 - 청동기 - 철기 시대로 변화하면서 역사는 발전 일변도로만 진행되어왔다는 사고방식은 결코 진리일 수 없다.
과연 조선시대가 신라시대보다 물질적으로 풍요로웠다고 말할 수 있을까?
몽골의 역사가 징기스칸 시대보다 지금이 보다 발전된 시대라고 말할 수 있을까? 중세유럽이 로마제국보다 더 탁월한 도시를 건설했다고 말할 수 있는가?
모든 것을 물질로만 설명하려는 것도 아마도 머지않아 폐기처분되어야 할 20세기를 전후한 시대의 역사학의 한 특징으로 전락될 것이다. 석유가 고갈된 시대가 온다면 아마도 인류는 많은 면에서 물질적 풍요를 과거보다 덜 누리게 될 것이다.
역사가 발전했다고 믿는 역사 발전론 그것이 한국 사학계가 가진 최대의 시각상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발전하지 못한 점, 오히려 퇴보한 점에 대해서 실랄한 비판이 부재하게 된 이유도 역사의 내적 발전만을 찾으려고 하는 선입견에서 나온 것이다. 그것은 시대적 상황에 대한 몰이해를 낳는다.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에서 진화론은 단 하나의 관점일 뿐이다. 이제 퇴보의 역사, 침체의 역사도 대비해야 한다. 역사가 퇴보했다면 퇴보된 원인을 찾고 그 개선방안을 모색하는 방법도 필요한 것이다.
국사교과서의 2/3 이상의 조선건국 이후의 불과 600년 역사로 채워져있고, 고려시대 이전의 역사는 겨우 1/3도 못되는 상황은 다른 나라와 비교해 볼 때에도 지나치게 근현대사의 비중에 치우쳐져 있다. 과거의 경험을 수직선이 아닌 평행선으로 놓고서 이곳 저곳에서 유용한 경험들을 얻으려고 할 때 우리 역사는 풍요로운 보물창고가 되는 것이다. 불과 수백년의 역사적 경험만을 가지고 우리의 모든 모습이라고 단정하고 이를 토대로 미래를 설계하는 것은 역사 결정론적 시각에 사로잡히기 쉽다.
우리는 진화론적 역사관이 갖는 제국주의적 역사관과 그것을 받아들이는 식민사학의 영향을 무시해서는 안될 것이다. 진화론의 역사관은 현시대의 앞선 자를 위한 역사학이고, 뒷선 자에게는 영원히 따라오지 못하는 패배주의 역사관을 심어주기 때문이다.
역사는 결코 진화한 것만은 아님을 우리는 과거사의 경험을 통해 배운다. 앞으로 우리가 노력하지 않는다면 역사는 퇴보하기도 한다는 것을 일깨워 준다.
지나친 낙관적 역사관, 종말론적 역사관, 현 시대에 의미를 부여하기 위한 목적론적 역사관에서 벗어나서, 인간이 살았던 시대 시대의 의미를 상대적인 관점에서 이해하는 습관을 길러보자.
역사는 인간을 배우는 인간학일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