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의발견-나의생각

연개소문과 기록의 중요성

영양대왕 2006. 1. 23. 11:44
연개소문과 기록의 중요성
번호 : 13   글쓴이 : 김용만
조회 : 560   스크랩 : 0   날짜 : 2002.05.11 12:26
몇년간 내 머리속에 가장 큰 화두는 연개소문이었다.
연개소문에 대한 글을 3년째 쓰면서도 헤메고 있지만 조만간 탈고를 할 예정이다. 이번 여름에는 책으로 출간될 수 있도록 지금 노력하고 있다.
연개소문은 처음 내가 그를 주목했을 때의 모습과 지금 내가 그를 바라보는 모습이 사뭇 다르다. 처음에는 그를 단편적으로 이해했다면 이제는 좀 더 입체적으로 이해해서 그런가 한다.

연개소문에 대한 평가를 한 분들은 많다. 신채호, 박은식을 비롯한 민족주의 사학자들로 부터 시작해서 수없이 많다.
그런데 신채호와 박은식은 그를 위대한 민족주의자, 고구려의 영웅으로 치켜세우는 것에만 신경을 썼지, 그가 가진 정치적 한계와 부족한 면모 그리고 고구려의 역량 등에 대하여 종합적으로 이해하지는 못했다. 그것은 대개의 학자들도 그러하다. 그를 역적이나 반은 영웅, 반은 흉역으로 보는 입장 등 그를 보는 시각은 다양하나, 공통된 점은 그에 대한 종합적 이해를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가장 큰 원인은 그에 대한 기록이 거의 없다는 것 때문이다.

반면 그의 일생의 라이벌인 이세민은 그에 대한 기록이 너무나 풍부하다. 신구당서, 자치통감, 책부원귀, 당회요, 전당문, 정관정요 등 그 문헌을 보는데만 해도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이세민은 중국이 어느 왕보다도 역사 기록에 많은 신경을 쓴 인물이다.
중국인들은 청사에 길이 기록되는 것을 대단한 영광으로 여긴다. 중국인처럼 기록문화에 충실한 자들도 흔치는 않을 것이다. 그 가운데 이세민은 특히 역사에서 자신을 어떻게 평가하는지에 대해서 예민했다.

연개소문은 왕을 죽이고 권력을 찬탈한 난신적자였다.
하지만 이세민은 자기 형과 동생을 죽인 정변(현무문 사건)을 일으키고, 아버지를 핍박해서 왕위를 빼앗고, 자기가 죽인 동생의 부인을 자기의 부인으로 삼기도 한 패륜아였다. 연개소문은 자신이 왜 왕을 죽일 수 밖에 없었는지에 대해서 아무런 변명거리를 만들어 놓지 못했다. 그를 적극적으로 옹호하는 기록은 원 사료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그래서 연개소문은 후대 학자들에 의해 도리어 위로를 받는다.

반면 이세민은 적극적으로 자기의 패륜적 행동에 대해 변명을 한다. 그는 역대 최초로 당대의 실록을 신하들을 핍박하여 억지로 보고서, 현무문 사건에 대해서 다시 기록할 것을 명한다. 그리고 이를 반대하는 신하들에게 자신은 성군이니까 괜찮다며 온갖 변명을 한다.
또 아버지 이연에 대한 실록은 자기 재위 기간에 완성하여 아버지를 조따로 만들고, 아버지의 공을 자기의 공으로 돌려놓는다. 그리고 그는 자기 시대에 앞선 남북조시대의 역사를 재구성하는 작업을 시도하여 북사, 남사, 진서, 수서 등 수 많은 역사서를 만들어낸다.

그리하여 이세민은 분식된 역사 기록을 통해 마치 위대한 성군인냥 추앙받게 되었다. 특히나 정관정요와 같은 목적지향적 책으로 인해 그는 실체보다 너무나 과장되었다. 동양사학계에서는 이미 이세민의 정치인 정관의 치가 과장되었으며, 역사 기록의 상당수가 이때에 왜곡되었음이 분명하다고 결론지어졌으며, 이에 대한 연구도 활발한 편이다. 그래서 그는 이제 후대사학자들에 의해 허명이 하나 하나 벗겨지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연개소문은 그의 진면목보다는 낮게 평가되며, 이세민은 너무나 훌륭한 임금으로 높게 평가받는다. 그래서 최근에 나온 어떤 책에는 역사의 진실을 파헤지는 문헌비평을 하지 않고, 중국인이 쓴 이세민에 대한 평전을 그대로 인용하여 그를 천책신장이니 성군이니 하면서 높게 평가하고 연개소문이나 고구려에 대해서는 기록이 없다느니 하면서 제대로 평가하는 것을 포기하기도 한다. 그 책을 읽으면서 얼마나 씁쓸했는지 모른다.

왜 연개소문은 기록을 남기지 못했을까. 그에 대한 우호적 입장을 가진 사람의 기록이 제대로 남아있다면 그를 좀 더 정확하게 알 수 있을텐데 늘 갖는 아쉬움이다. 물론 그런 기록이 있다면 내 작업은 진작에 탈고를 했을 것이다.

고구려측 기록이 부족하다는 것은 어제 오늘 말해지는 것도 아닌 이상 이를 탓하며 내 작업의 부진의 변명거리로 삼자는 것이 아니다. 나는 지금부터라도 우리가 기록의 중요함을 알아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최근에 EBS에서 재방영하는 알렉스헤일리의 "뿌리"를 본 분들이 있을 것이다. 거기서 백인들이 흑인에게 글을 읽게 하지 않도록 하는 부분이 나오는데 글을 읽고 쓰면 논리적 사고를 하게 된다는 것이다. 글을 쓰고 그것을 남기는 것이 곧 문명의 출발이다. 기록이 사라지면 그 문명은 죽는 것이다.

기록은 축적이다. 기록으로 남겨진 정보와 지식이 축적되면 그 다음 시대에는 보다 많은 정보와 지식을 갖게 됨으로써 자신들의 문명을 더 발전시킬 수 있다. 기록이 전해지지 않으면 과거의 일들은 잊혀진다. 조선시대에는 광개토대왕릉비문 조차 고구려의 것인지도 몰랐을 정도로 고구려에 대해서 알지 못했다. 이규모와 북애자의 한탄처럼 중국의 역사를 줄줄이 외면서 한국의 역사는 제대로 알지 못한다.

연개소문을 생각하면서 나는 기록의 중요성을 다시금 생각해본다. 나는 내 기록을 제대로 남기고 있는 것일까. 우리나라는 과연 어떤가. 우리가 알고 있는 지식들은 제대로 남겨서 후대 사람들에게 제대로 전하고 있는 것일까. 이것은 역사가의 문제만이 아니라, 기업에 다니는 사람, 사업을 하는 사람, 학생 모두에게 해당된다.

제대로 된 기록을 제대로 남겨서 자신에게 도움이 되는 정보와 경험을 남겨야 보다 발전된 내일이 있다. 기록은 문명 발전의 근간이다. 기록이 남아있지 않다면 복원에 너무 많은 힘이 필요하고 옛 일에 대한 정확한 평가도 하기 어렵게 된다.
나는 기록이 차이가 곧 중국이 오늘날 인구대국이 되고, 한국이 그에 비해 인구가 적은 나라가 된 중요한 이유이며, 우리 역사가 축소된 중요한 이유라고 생각한다. 자신들의 기록, 나라의 기록을 소중히 여겼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