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작업과공부

광개토태왕의 위대한 길 출간

영양대왕 2011. 7. 19. 23:01

드디어 [새로쓰는 연개소문전] 다음으로 고구려 시대사를 다룬 나의 책이 출간되었다.

2007년 계약해서, 너무 늦게 탈고를 했고, 출간까지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전체적으로는 만족한다.

후회 없다. 수고했다. 이제 한 걸음을 또 내딛었다.

다음 걸음을 위해 또 책상에 앉자.

오늘자 교보문고에 올라온 책 소개+ 출판사 서평을 여기에 올린다.

 

광개토태왕의 위대한 길

 

저자 : 김용만 | 출판사 : 역사의아침

2011년 07월 20일 출간 | 392쪽 | A5 | 정 가 : 15,000원

 

책소개

지나친 유명세에 비하여 광개토태왕의 진면목은 온갖 선입견과 오해 때문에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 『광개토태왕의 위대한 길』은 광개토태왕이 왜 정복 활동에 나서게 되었고, 그가 정복 활동을 성공적으로 수행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인지, 그리고 그가 이룬 성과와 의미를 알기 위해 고구려인의 입장, 광개토태왕의 입장, 상대방의 입장에서 그 시대를 돌아보았다. 정복 군주라는 단편적인 면만 부각된 광개토태왕이 어떤 인물이고, 어떻게 고구려 역사를 바꾸어갔는지 확인할 수 있다.

 

저자소개 : 김 용 만

고려대학교 졸업하고 정신문화연구원 역사학과에서 공부했으며 현재 <우리역사문화연구소> 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주요 논문 : 「고구려 수레 연구」, 「2차 고구려-당 전쟁의 진행과정과 의의」, 「고구려 후기 고구려, 수, 당, 북방 제국의 대립관계」

주요 저서 : 『인물로 보는 고구려사』, 『새로 쓰는 연개소문전』, 『고구려의 그 많던 수레는 다 어디로 갔을까』, 『고구려의 발견』, 『지도로 보는 한국사』, 『세상을 바꾼 수레』

 

목차

머리말 ㆍ 5

 

1부 광개토태왕 시대로 들어서기

 

1장 광개토태왕 시대로 들어가기 전에 ㆍ 19

1. 새롭게 발견된 영웅 광개토태왕 ㆍ 19

2. 광개토태왕을 깨운 비문의 발견 ㆍ 24

3. 대왕이 아닌 태왕이다 ㆍ 32

4. 「광개토태왕릉비문」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ㆍ 43

5. 「광개토태왕릉비문」과 『삼국사기』의 1년 오차 문제 ㆍ 53

6. 영락 17년 정벌 대상은? ㆍ 63

 

2장 어린 담덕의 기억 ㆍ 79

1. 담덕의 어린 시절 ㆍ 79

2. 할아버지 고국원왕과 모용선비 ㆍ 83

① 모용선비, 악연의 시작 ㆍ 83

② 미천왕, 기회를 놓치다 ㆍ 86

③ 고국원왕의 굴욕 ㆍ 89

3. 고국원왕의 죽음과 백제 ㆍ 95

4. 고구려의 성장 모델 모용선비 ㆍ 100

 

3장 담덕이 물려받은 유산 ㆍ 105

1. 두 아들의 복수 ㆍ 105

2. 율령 제정의 효과 ㆍ 114

3. 태학 설립의 효과 ㆍ 121

4. 불교 수용의 효과 ㆍ 131

 

2부 광개토태왕의 정복 활동

 

4장 태왕의 첫걸음 거란 정벌 ㆍ 139

1. 첫 번째 원정 상대 ㆍ 139

2. 거란 정벌의 경제적 가치 ㆍ 147

3. 거란 원정의 성공 이유 ㆍ 153

4. 거란 원정의 가치 ㆍ 159

 

5장 동족이자 경쟁자 백제 ㆍ 164

1. 고구려에 특별한 나라 백제 ㆍ 164

2. 4세기 말 두 나라의 국력 ㆍ 167

3. 백제 정벌에 동원된 말갈 ㆍ 169

4. 백제 포위 작전 ㆍ 174

5. 영락 6년 백제 정벌 ㆍ 179

6. 왜 백제를 멸망시키지 못했을까? ㆍ 185

7. 백제인에게 무덤 관리를 맡기다 ㆍ 188

 

6장 동북 경영에 나서다 ㆍ 193

1. 영락 8년조 해석 문제 ㆍ 193

2. 숙신과 고구려 ㆍ 196

 

7장 신라 구원과 남해안 대원정 ㆍ 201

1. 신라의 구원 요청에 응한 까닭은? ㆍ 201

2. 남해안 대원정 ㆍ 206

3. 신라의 역사를 바꾼 고구려 ㆍ 212

4. 신라에 끼친 고구려의 영향 ㆍ 218

5. 가야의 역사를 바꾼 고구려 ㆍ 229

 

8장 고구려에 왜국은? ㆍ 232

1. 왜의 등장 ㆍ 232

2. 「광개토태왕릉비문」에 등장하는 왜국 ㆍ 236

3. 왜의 실제 능력 ㆍ 241

4. 참살 대상이 된 왜군 ㆍ 244

 

9장 복수의 완성, 후연 가는 길 ㆍ 250

1. 후연의 기습 ㆍ 250

2. 후연 정벌 ㆍ 253

3. 북연과 고구려의 관계 ㆍ 263

 

10장 광개토태왕의 마지막 정벌지 동부여 ㆍ 269

1. 동부 지역 영토를 넓힌 동부여 정벌 ㆍ 269

2. 광개토태왕이 깨뜨린 성의 수는? ㆍ 274

 

3부 고구려와 광개토태왕

 

11장 광개토태왕과 사람들 ㆍ 281

1. 광개토태왕의 신하들 ㆍ 281

2. 북부여의 수사 모두루 ㆍ 289

3. 덕흥리 벽화고분의 주인 유주자사 진 ㆍ 294

4. 광개토태왕의 무덤을 지킨 수묘인 ㆍ 300

5. 광개토태왕의 계승자 장수왕 ㆍ 304

 

12장 광개토태왕의 국가 경영 ㆍ 313

1. 광개토태왕의 국가 경영 목표 ㆍ 313

2. 법과 제도 정비 ㆍ 315

3. 종교 정책 ㆍ 320

4. 국토 재편과 평양 천도 준비 ㆍ 326

5. 백성을 위한 정책 ㆍ 334

 

13장 광개토태왕은 고구려에 무엇을 남겼나 ㆍ 337

1. 길을 열어간 태왕 ㆍ 337

2. 고구려 제국의 길에 들어서다 ㆍ 342

 

부록 「광개토태왕릉비문」 원문과 번역문 ㆍ 348

도판의 출처 ㆍ 357

주석 ㆍ 358

참고문헌 ㆍ 376

찾아보기 ㆍ 387

 

책속으로

광개토태왕이 시라무렌강 유역까지 장거리 원정을 떠난 것은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이를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1. 거란에 빼앗긴 고구려인 1만여 명을 되찾는 것(인구 확보).

2. 고구려인의 수호자라는 명분 획득(백성의 지지 확보).

3. 소, 말, 양, 소금 획득(경제적 이익).

4. 후연을 공격하기 위한 교두보 마련.

391년 원정은 빼앗긴 백성을 되찾아 고구려인의 수호자로서 백성의 지지를 얻기 위해서였다. 광개토태왕은 즉위한 직후 백성의 충성심을 끌어낼 업적을 쌓는 것이 무엇보다 시급했다. 전쟁이 잦은 시대에 적에게 포로가 되더라도 국가에서 구해줄 것이라는 믿음이 있다면 충성심으로 연결된다. 이산가족의 문제를 국가가 해결해줄 때 백성의 충성심은 커질 수밖에 없다. 거란 정벌은 광개토태왕에게 고구려인을 지켜주는 수호자라는 영예를 안겨주었다. 그 결과 집권 초기에 생길 수 있는 정통성과 권위의 문제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다. 또 이후에 벌일 전쟁을 보다 효율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백성의 지지 기반을 마련할 수 있었다. 광개토태왕은 이런 계산을 염두에 두고 거란 정벌을 최우선 순위로 실천했다고 할 수 있다.

- 4장 <태왕의 첫걸음 거란 정벌> 중에서(147~148쪽)

 

광개토태왕은 손상된 고구려 왕실의 권위를 회복하고, 고구려인의 자존심을 세우고, 사방의 외적을 물리쳐 나라를 평안하게 한 것만으로도 임금의 임무를 다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활발한 정복 활동을 통해 고구려를 제국으로 발전시켰고, 그에 걸맞은 여러 가지 조치를 취했다. 평양을 제국의 수도로 삼고자 준비하고, 불교를 보호 육성해 다양한 가치관을 존중하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기울였다. 또 제국의 위상에 걸맞게 태왕호와 연호를 사용하는 등 고구려의 자긍심을 높이기 위한 조치를 취했다. 그가 개척한 요동 땅에서는 풍부한 철이, 한강 유역에서는 많은 농산물이 생산되었으며, 초원 지대에서는 말과 소, 양이 자랐다. 그의 정복 활동은 고구려를 풍요로운 나라로 만들었다. 풍요로움이야말로 제국으로 번성할 수 있는 힘이다. 그는 고구려를 평안한 나라로 만들고자 했고, 어느 정도는 성공을 거두었다. 수묘제 등 국가 의례를 정비하고 법령을 제정하고 행정관리를 육성해 고구려를 법치국가로 만든 유능한 통치자였다.

- 13장 <광개토태왕은 고구려에 무엇을 남겼나> 중에서(342~343쪽)

 

광개토태왕이 등장하기 전에 고구려는 진정한 제국의 면모를 갖춘 적이 없다. 광개토태왕 때 강력해진 국력을 바탕으로 비로소 정치, 경제, 문화, 기술, 외교의 중심국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5∼6세기 동아시아에 이런 제국은 고구려를 포함해 4∼5개국에 불과했다. 장수태왕이 아버지의 뒤를 이어 고구려 제국을 완성하자 제국의 영향권에 속한 백제, 신라, 동부여, 가야 등의 문화적 일체감이 더욱 커지면서 우리 민족사의 발전 과정에서 통일 의지가 싹트게 되었다.

필자는 흥안령에서 연해주, 발해만에서 남해까지 고구려의 영토를 넓힌 것보다, 고구려의 질적 변화를 가져온 것이 더 중요한 광개토태왕의 업적이라고 본다. 이제 고구려는 단일 문화권의 좁은 나라가 아니라 여러 문화를 흡수해 융합하고 새로운 문화를 창출해내는 나라, 고구려 문명의 중심 국가가 되었다.

물론 광개토태왕 시대에 모든 것을 이루지는 못했다. 또 그는 조선시대에는 잊힌 임금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고구려의 역사를 바꾸어놓은 인물로, 한국사에서 새로운 길을 연 인물로 높이 평가할 만하다. 그 과정에서 행운도 따랐고, 한계를 보이기도 했다. 그의 인격이나 사생활에 대해 알 수 있는 자료가 부족한 가운데 그를 과도하게 영웅시하거나 이유 없이 격하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그가 개척한 땅은 보는 이에 따라 넓을 수도, 좁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가 고구려사를, 한국사를 크게 변화시켰다는 것만큼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 13장 <광개토태왕은 고구려에 무엇을 남겼나> 중에서(345~346쪽)

 

출판사 서평

한국인이라면 광개토태왕의 참모습을 알아야 한다!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으로 기록된 광개토태왕. 그는 대왕, 선우, 황제가 아닌 태왕이다. 그로 인해 고구려는 태왕의 시대, 제국의 시대, 포용의 시대, 다원화된 시대로 접어들었다. 그는 단순히 영토욕에 가득한 정복 군주가 아니었다. 18세에 즉위하여 39세에 세상을 떠날 때까지 22년간 재위하면서 그는 고구려 역사를 크게 바꾸어놓았다. 그는 고구려사 나아가 한국사에서 처음 만나는 진정한 태왕이다.

지나친 유명세에 비하여 광개토태왕의 진면목은 온갖 선입견과 오해 때문에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 『광개토태왕의 위대한 길』은 광개토태왕이 왜 정복 활동에 나서게 되었고, 그가 정복 활동을 성공적으로 수행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인지, 그리고 그가 이룬 성과와 의미를 알기 위해 고구려인의 입장, 광개토태왕의 입장, 상대방의 입장에서 그 시대를 돌아보았다. 정복 군주라는 단편적인 면만 부각된 광개토태왕이 어떤 인물이고, 어떻게 고구려 역사를 바꾸어갔는지 확인할 수 있다.

 

고구려 역사의 거대한 변화를 이끈

한국사 최초의 진정한 태왕을 만나다!

 

세종대왕과 더불어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역사상 위인인 광개토태왕. 그의 훈적을 기려 세운 광개토태왕릉비에는 광개토왕을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으로 기록했다. 광개토태왕의 정식 호칭을 풀어보면 '국강상國岡上'은 그의 무덤이 있는 지명(국내성)을 가리키고, '광개토경廣開土境'과 '평안平安'은 그의 업적을 뜻하며, '호好'는 미칭美稱이다. 그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광개토태왕은 고구려 영토를 넓히고 백성을 편안히 살게 한 임금이다.

태왕은 단순한 왕이 아니라 왕 가운데 왕이며, 제국을 다스리는 최고 지배자다. 왕이 단일한 체제를 갖춘 나라의 지배자라면, 태왕은 다양한 체제를 아우른 광범위한 제국의 지배자다. 태왕은 선택받은 자, 인간 사회의 최고 지배자를 뜻한다. 황제·칸·선우·가한 등과 다름없는, 한국사에 등장하는 최고 지배자의 호칭이다. 대왕은 뛰어난 임금을 칭송하기 위해 후손이 붙인 호칭인 데 반해 태왕은 단순히 큰 임금이 아니라 고구려시대에 통용되던 상징성을 지닌 용어이며, 고구려 사람들은 광개토태왕을 일컬어 태왕이라고 불렀다.

그는 대왕, 선우, 황제가 아닌 태왕이다. 그로 인해 고구려는 태왕의 시대, 제국의 시대, 포용의 시대, 다원화된 시대로 접어들었다. 그는 단순히 영토욕에 가득한 정복 군주가 아니었다. 18세에 즉위하여 39세에 세상을 떠날 때까지 22년간 재위하면서 그는 고구려 역사를 크게 바꾸어놓았다. 그는 고구려사 나아가 한국사에서 처음 만나는 진정한 태왕이다.

『광개토태왕의 위대한 길』은 광개토태왕이 활발한 정복 활동으로 고구려 영토를 크게 넓히고, 내치內治에도 힘써 백성을 편안케 했으며, 독자적인 연호(영락)를 사용해 태왕(천자)의 지위를 확립하는 등 고구려 역사의 거대한 변화를 이끌어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한국인이라면 광개토태왕을 알아야 한다.

신화에서 역사가 된 광개토태왕의 실체를 만나다!

 

19세기 말 '광개토태왕릉비'가 발견되기 전까지 광개토태왕은 평범한 고구려의 왕으로 기억되었을 뿐이다. 그런데 20세기 이후 갑자기 한국 역사상 최고 영웅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그를 재발견하게 된 원인은 무엇일까? 그 시작은 1883년 일본 육군 참모본부의 밀정 사코 가게아키[酒均景信] 대위가 만주 지역을 정탐하던 중 광개토태왕릉비를 발견해 비문을 탁본을 만들어 일본으로 가져간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 후 1905년 「황성신문」의 「광개토태왕릉비문」내용 보도, 단재 신채호 등의 연구, 1972년 일본 참모본부에 의한 「비문」 조작설에서 비롯된 학술 논쟁, 1980년대의 민족주의 사학 열풍, 2002년부터 시작된 중국의 동북공정, 2007년 광개토태왕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TV 드라마 「태왕사신기」 방영 등으로 그에 대한 한국인의 관심은 지속적으로 높아져만 갔다. 그러나 지나친 유명세에 비하여 광개토태왕의 진면목은 온갖 선입견과 오해 때문에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

광개토태왕의 업적 가운데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물론 정복 활동이다. 그러나 그것이 오히려 그의 업적을 한정 짓게 하여 그가 이룬 다른 성과들은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다. 광개토태왕은 정복 군주라는 타이틀을 얻기 위해 전쟁터에 나선 것은 아니다. 고구려 사람이 주변의 적들로부터 자존심을 지키며 살아갈 수 있는 평화롭고 강력한 나라를 건설하기 위해 전쟁이 필요했을 뿐이다. 정복 활동의 결과 고구려의 영토는 크게 늘어났고, 늘어난 영토는 곧 식량 생산의 증대로 이어져 백성의 수가 증가하는 효과를 가져왔다. 또 고구려의 구민뿐 아니라 새롭게 편입된 주변의 다양한 종족을 다스리는 나라가 되었다. 그렇게 고구려는 하나의 왕국이 아니라 제국으로서 성장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 광개토태왕의 정복 활동이 일단락된 후, 고구려는 5∼6세기에 걸쳐 오랜 기간 평화와 안정[平安]를 누릴 수 있었다.

고구려는 광개토태왕의 정복 활동으로 획득한 포로, 가축, 농경지, 목초지, 삼림 등을 경제적 기반으로 삼아 이후에 주변 나라들의 정치, 경제, 문화, 기술, 외교의 중심국이 될 수 있었다. 이러한 점 때문에 광개토태왕을 '고구려 역사의 새 길을 연 군주'로 평가할 수 있다.

『광개토태왕의 위대한 길』은 광개토태왕이 왜 정복 활동에 나서게 되었고, 그가 정복 활동을 성공적으로 수행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인지, 그리고 그가 이룬 성과와 의미를 알기 위해 고구려인의 입장, 광개토태왕의 입장, 상대방의 입장에서 그 시대를 돌아보았다. 정복 군주라는 단편적인 면만 부각된 광개토태왕이 어떤 인물이고, 어떻게 고구려 역사를 바꾸어갔는지 확인할 수 있다.

 

여러 문화를 흡수해 융합하고 새로운 문화를 창출해

고구려 역사의 새로운 길을 열다!

 

광개토태왕은 소수림왕이 제정한 법과 제도를 더욱 정비하고 연호를 사용함으로써 고구려가 제국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했고, 소수림왕 때 공인되었으나 쉽게 전파되지 못한 불교가 뿌리를 내리고 널리 퍼질 수 있도록 평양에 사찰 9개를 창건하기도 했다.

또한 적국을 공격해 새로 차지한 땅 중에서 황무지를 개간해 사람들이 농사를 짓고 살게 하여 조세 수입이 가능한 땅으로 만들었으며, 특정 지역의 백성을 이주시켜 국토 재편을 통한 지방의 지배력 강화, 생산력 증대, 국방력 강화를 꾀했다. 광개토태왕의 정책으로 고구려는 인구 재배치를 통한 국토의 균형 발전을 이룰 수 있었다.

나아가 광개토태왕은 평양 지역을 장차 수도로 삼기 위한 여러 조치를 취해 장수태왕이 이를 실행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들었다. 광개토태왕이 평양으로 천도하려 한 것은 제국의 수도를 건설하기 위해서였다. 국내성은 압록강 중류의 작은 분지에 있어 방어하기에는 좋으나, 많은 인구를 먹여 살리기에는 땅이 부족했다. 국내성은 왕국의 수도로는 적합하지만 제국의 수도로는 어울리지 않았다. 광개토태왕은 재위 기간 동안 수시로 평양에 머물렀는데, 단순히 평양에 왕의 거처만 옮기려던 것이 아니라 평양을 개발해 제국의 수도에 어울리는 정치·경제·행정·교통·종교의 중심지로 만들고자 했다. 광개토태왕은 고구려 제국의 미래를 보고 평양 천도를 준비했고, 그 아들 장수태왕이 이를 실현하여 평양은 고구려 제국의 수도가 되어, 제국이 멸망할 때까지 강력한 심장 역할을 했다.

광개토태왕은 고구려의 질적 변화를 가져온 임금으로, 고구려를 단일 문화권의 좁은 나라가 아니라 여러 문화를 흡수해 융합하고 새로운 문화를 창출해내는 나라로 만들었다. 광개토태왕 시대에 모든 것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그는 고구려 역사를 크게 바꾸어 한국사의 새로운 길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