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의발견-나의생각

양성지의 비변 십책 중 1책이 떠오르는 요즘 현실.

영양대왕 2010. 12. 29. 14:23

현실 정치 이야기는 가급적 하지 않고 싶다.

여러 오해를 불러 일으킬 수 있고, 내가 이야기 할 자리에 있지 않은데, 괜한 감내라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요즘 일어나는 상황과 그저께 우연히 본 아테나 라는 드라마에서 본 상황을 보면서, 문득 양성지의 말이 떠올랐다.

양성지는 내가 알고 싶은 인물들 가운데 늘 상위권에 자리한 분이다.

그가 36세에 세종에게 올린 비변십책 가운데 제 1책에 내가 요즘 하고 싶은 말이 담겨져 있다.

우선 장황하게 비변십책 1책을 소개한다.

 

<세종실록> 권 127 세종 32년 1월 15일 신묘.

 

집현전 부교리(集賢殿副校理) 양성지(梁誠之)가 비변(備邊)에 대한 열 가지 방책을 올렸는데, 첫째에 이르기를,
“국가의 계책을 세우는 것입니다. 대개 천하의 일은 계획은 먼저 결정하여야 하오니, 계획을 먼저 결정하지 않으면 만사가 실패하는 원인이 되는 것이옵니다. 지금 북방(北方)의 일을 혹은 ‘방금 태평한데 무슨 외환(外患)이 있겠는가.’ 하고, 혹은 이르기를, ‘달달(達達)이 수천리 밖에 있는데 어찌 우리에게 관계 있는가.’ 하옵는데, 신이 가만히 보옵건대, 원 태조(元太祖)가 중원(中原)에 들어올 때에 20나라를 멸(滅)하고 서하(西夏)까지 미쳤으며, 하(夏)나라가 망하자 금(金)나라를 침범하였고, 금나라가 망하매 송(宋) 나라를 침범하였사온데, 송나라와 금나라가 채 망하기 전에 친히 서역(西域)을 정벌하여 철문관(鐵門關)에까지 이르고, 또 서이(西夷)와 남이(南夷)를 해도(海道) 수만리 지방까지 정벌하였사오며, 세조(世祖) 때에 와서는 동쪽으로 일본(日本)을 정벌할 때 수십만의 군사를 죽이면서도 마지 않았고, 고려(高麗)를 정벌할 때는 군사를 움직이기 무려 70년에 군사의 힘을 다하고 무기를 있는 대로 썼사오니, 대개 습속(習俗)이 그러한 것이옵니다. 하물며 이미 중국에 자녀(子女)와 옥백(玉帛)의 있는 곳을 알고 벌써 힘들여 빼앗아 가지고 있음에오리까. 80년 동안을 비록 사막(沙漠) 지방에서 살면서 어느 때고 하루라도 중국을 잊을 수가 있었겠습니까. 이제 먼저 삼위(三衛)를 탈취하여 중국의 번리(藩蘺)를 제거하였고, 다음에는 해서(海西)의 여러 종족을 위협하여 그의 도당(徒黨)을 만들고서, 이에 길을 나누어 남쪽으로 내려오니 관외(關外)가 크게 진동하매, 천자(天子)가 친히 정벌하다가 도리어 되놈에게 함몰되니, 되놈의 기병이 이긴 기세를 타서 곧바로 황성(皇城) 밑까지 쳐들어 왔으니 그 병력이 어떠하겠습니까. 중국 고황제(高皇帝)의 어지러움을 발거(拔去)한 공(功)과 오늘날 갑병(甲兵)의 성(盛)한 것으로도 한번 싸워서 패함이 이와 같은 데에 이르렀거든, 하물며 병력이 이만 못한 것이겠습니까. 저들이 어찌 동방(東方)에 우리 나라가 있는 것을 알지 못하겠습니까. 아직까지 개의하지 않는 것은 한참 중원(中原)에다 힘을 쓰고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아침에 요동(遼東) 땅을 얻게 되면 동정(東征)의 군사가 저녁에 나올 것이옵고, 비록 요동에서 뜻을 얻지 못한다 하더라도 또한 다른 길을 거쳐 우리에게 분풀이를 하려고 할 것입니다. 신이 지나간 일로써 상고하오면, 적인(敵人)이 지경을 침범할 때에 처음에는 압록강(鴨綠江)의 험한 것을 지키다가 중간에는 안주(安州)나 평양(平壤)의 요충에서 막아내고, 마지막에서 절령(岊嶺)에 책(柵)을 세워 막는데, 절령(岊嶺)으로 관문(關門)을 삼게 되오면 어찌할 수 없게 되옵니다. 저들이 이미 장성(長城)의 험한 것을 넘어 황성(皇城)의 곁에까지 들어갔는데 어찌 압록강을 건너 서울 근처까지 오기가 어렵겠습니까. 하물며 범찰(凡察)과 만주(滿住)와도 틈이 생긴 지가 여러 해 되었으므로 또한 반드시 그 위력을 빌어서 그의 뜻을 펴보려 할 것이오니, 변흔(邊釁)이 한번 일어나게 되면 생민(生民)의 화(禍)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변경(邊境)의 일이 비록 반드시 조석(朝夕) 간에 있는 것은 아니오나, 실은 오늘부터 시작되는 것이옵니다. 의논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이르기를, ‘적이 만일 침범하여 짓밟는다면 겸손한 말과 후한 선물로써 한때의 환란을 면할 수 있다.’고 하오나, 신이 전조(前朝)를 보건대, 원(元) 나라를 섬긴 뒤에도 살례탑(撒禮塔)·차라대(車羅大)·홍다구(洪茶丘)의 침략하는 군사가 없는 해가 없었사오니, 이것들은 예절과 신의로써 상대할 수 없는 것이옵니다. 만약에 우리 병력이 부족하다면 달달(達達)이 어찌 우리를 사랑하는 자이겠습니까. 부득이하여 권도(權道)에 좇아 수호(修好)하는 것이오니 모름지기 한번 대승(大勝)하여야 옳을 것이옵니다. 저들이 우리의 병력이 서로 대적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연후에야 감히 가볍게 군사를 일으키지 못하여 봉강(封疆)을 가히 지킬 수 있습니다. 전조(前朝) 때에 요(遼)와 금(金)에게 한 것이 이것이옵니다. 그렇게 되려면 화친을 하거나 전쟁을 하거나 모두 군사를 쓰지 않을 수 없으므로, 신이 감히 장수와 군졸을 뽑고 군량을 저축하며 기계(器械)를 준비하고 성보(城堡)를 수리하는 것이 당금(當今)의 급무(急務)라고 하는 것이옵니다.” 
하고, 둘째에 이르기를,
(** 이런 것은 한국역사고전종합db 에서 쉽게 퍼올 수 있다. http://db.itkc.or.kr ).

 

양성지는 비사후폐(卑辭厚幣- 몸을 낮추고 예물을 많이 바침)로서 평활르 추구해서는 아니되고, 적과 수호(修好) 할 경우라도 반드시 한 번 크게 대승을 거두어 우리의 군사력이 저들과 맞설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다음에 해야 한다고 말한다. 고려가 요, 금과 싸워 승리한 후에 수호를 했기 때문에, 강토를 지켜내고 자주성을 지켜낼 수 있었던 것임을 그는 지적했다.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남에게 양보하기만 해서는 뒷날 국가의 자주성은 어찌 지켜낼 지 궁금하다.

한국의 외교라인 당국자들은 양성지의 말을 좀 새겨 들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