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의발견-나의생각

선진과 후진 대체 그 기준이 무엇일까?- (신라 문자 사용 여부와 관련하여)

영양대왕 2009. 6. 4. 21:18

선진과 후진 대체 그 기준이 무엇일까?

문자를 쓰지 않으면 후진 문명인가?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인위(人爲)만을 기준으로 선진과 후진을 비교하려고 한다면

노자는 미개한 후진국형 인간이고,

공자는 개화된 중진국형 인간이고,

상앙은 앞선 선진국형 인간이란 되고 만다.

 

인위는 당연히 인간이 많은 곳에서 더 많아질 수밖에 없다.

서기 1세기 중원평원에는 3300만이 살았다. 한나라 전체 인구 5900만 중에 절반 이상이 한 나라 영토의 1/10에 해당하는 지역에서 옹기종기 살았다. 여기에 중원평야에도 200만이 살았다. 다른 지역과는 비교할 수 없을만큼 인구가 많았던 만큼 이들이 만든 인위적인 산물은 다른 곳과 비교할 수가 없다.

건국된 후 몇 백년간은 인구가 10만에도 미치지 못했을 것으로 생각되는 신라가 한나라와 문명을 비교할 수는 없다.

그렇다고 해서 신라 사람들이 무조건 한나라 사람들보다 열등한 인간들일까?

세계적인 문화유산이 넘치는 프랑스와 기억나는 것이라고는 도박장과 박주영이 속한 축구클럽 밖에 없는 모나코를 비교하여 프랑스 사람들은 선진적이고, 모나코 사람들은 열등하다고 말할 수는 없지 않는가?

 

문자라는 것도 선진과 후진을 가름하는 기준이 될 수는 없다. 기원전 3천년전 우르와 같은 수메르의 도시국가들은 일찍부터 상업을 발전시켰기에 어린 아이들에게 글자를 가르쳤다. 반면 서기 13세기 칭기즈칸이 등장할 때 몽골인들은 문자를 사용하지 않았지만 세계를 제패할 저력을 갖고서 문자를 사용한 인간들을 수하로 부렸다.

 

[양서]에 신라가 문자를 사용하지 않았다는 표현은 이미 학계에서도 양서가 충분한 정보를 얻지 못해서 쓴 잘못된 기록이라고 공인한 것이다. 신라는 확실히 그 보다 먼저 글자를 사용했다. 기원전 1세기 경의 생활상을 알려주는 경남 창원군 다호리 유적에서도 이미 글자 사용이 확실했음을 알려주는 붓이 출토된 만큼, 다호리와 그다지 멀리 떨어지지 않는 신라에서 글자를 몰랐다고 볼 수가 없다. 또 고조선 사람들은 한자를 알고 사용하였던 만큼, 그 유민들이 신라로 갔으니 신라도 건국 초부터 한자를 사용했음은 확실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신라인들이 한자를 알았다고 해도, 한자를 일상생활에서 널리 사용했다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글자는 그 쓰임새가 있을 때에만 널리 사용된다. 신라는 7세기말 8세기에 목판인쇄술이 발달한다. 당나라보다 앞섰거나 비슷했다고 볼 수가 있는데, 굳이 이때 목판인쇄술이 발전한 것은 불경의 대량 수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삼국통일전쟁이 끝나면서 신라 사람들은 전쟁에서 겪은 정신적 공황을 해결하기 위해 불교에 심취했다. 불교가 널리 퍼지면서 불경 수요가 늘어났던 것이다.

그렇다면 [양서]가 만들어진 당시에 신라는 어떤 상황일까. 불경 널리 보급되지 않았다. 일상생활에서 문자 거의 사용되지 않았다. 신라의 신궁에서 종교행사를 할 때 특별한 경전을 사용하지 않았거나, 신라 고유 신앙에서는 교리를 담긴 경전을 개인이 소유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문자를 거의 사용하지 않던 신라가 갑자기 문자를 많이 사용하게 된 것은 종교의 변화와 더불어 외교 관계의 변화도 큰 이유였다. 열등하던 신라인들이 갑자기 선진적이 된 것은 결코 아니다.

 

우리가 진짜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은 남과 비교해서 우리 조상들이 잘났느니 못 났느니를 따지는 것이 아니라, 왜 우리 조상들은 이렇게 살았으며, 저렇게 문명을 만들었는지를 파악하는 일이다.

우리 역사가 왜 이렇게 전개되었는지부터 이해하고, 그 속에서 삶을 살았던 옛 사람들로부터 배울 점을 찾는 것이 먼저가 아닐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