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의발견-나의생각

[스크랩] 요녕성박물관에서 본 요하문명론.(사진 수정)

영양대왕 2007. 1. 19. 13:23

* 고구려 토론방에 호산산성에 관한 글과 함께 카페지기가 2006년 12월 30일부터 올 1월 3일까지 심양, 단동 등지를 답사하면서 느끼고 생각한 것을 적습니다.  

 

 필자는 2007년 1월 3일에 심양시 요녕성 박물관 3층 전시실에 있었다. 이곳에서는 2006년 6월부터 요하문명전이 열리고 있다. 요녕성 박물관은 2004년에 현재의 건물로 이사를 오면서 1층과 2층 전시실만 개장하고, 3층 전시실은 그동안 전시 준비 중이었다. 그런데 작년 6월 요하문명전이 개최되면서, 이를 본 많은 한국 연구자들이 충격을 받고 돌아왔다. 필자는 6월 이후 2차례나 심양시를 방문했음에도 요녕성 박물관을 관람할 시간을 얻지 못하여, 내심 안타까워했다. 그 대신 아는 이들로부터 사진 자료를 얻어서 그 내용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다.

 

  필자는 2005년 여름에 중국사를 16시간에 걸쳐 특강을 할 기회가 있었다. 그때 필자는 2001년에 출간된 자오춘칭(趙春靑)과 친원성(秦文生)이 쓴 『문명의 새벽(chinese civilizatiom in a new light)』( 이 책은 2003년에 조영현 옮김으로 『문명의 새벽』이란 제목으로 시공사에서 출간되었다. )을 앞 2시간의 교제로 사용한 바가 있었다. 이 책의 내용을 강의할 때 책에 서술된 중국학계의 연구 동향 가운데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홍산문화(紅山文化)라 일컬어지는 서요하 유역(내몽고와 요녕성 서부의 적봉시, 조양시, 건평현 등)에서 일어난 5천년 전의 신석기 문화를 황제(黃帝) 헌원 집단의 문화로 설정한 부분이었다. 황제라고 하면, 중국인의 전설상의 시조(始祖)로서 묘족 또는 동이족의 선조인 치우(蚩尤)와 겨룬 인물이다. 중국인들은 모두 황제의 자손이라고 그간 자부해왔다. 중국인들은 염제(炎帝) 신농과 함께 그를 중국의 조상으로 간주했다.

 

  중국에서는 1987년부터 하남성 정주시 황하 풍경명승구 퉁명(同盟)산 기슭에 염제 황제 조각상을 높이 106미터로 조각하여, 20년 만에 완공하여 염황 2제 조각공원과 염황 광장을 만들어 곧 일반에 공개할 예정으로 있다. 이에 들어간 비용만 해도 1억 2천만 위안(약 143억원)으로, 세계 제 1의 조각상을 만들었다고 자랑이다.(중앙일보, 2006년 10월 18일자. 참조.) 황제 헌원의 무덤은 섬서성 황릉현 교산에 위치하고 있는데, 한나라 무제(武帝)도 이곳에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그런데 느닷없이 수천㎞ 떨어진 요서지역에 황제가 온 것은 무슨 일이란 말인가?

 

  필자는 답사 첫날 심양에서 단동으로 가는 버스 안에서 노트북을 활용해 홍산문화 옥기(玉器)에 관한 동영상을 약 40분 정도 보여주며 설명을 해주었다. 모두가 놀라워할 만큼 신석기 시대에 만든 정교한 옥기들이 바로 요서지역에서 그것도 놀랍게도 지금부터 수천 년 전에서 최고 8천년 전에 만들어졌다는 사실이 경악스럽기 그지없다.

 

  그렇다면 대체 요서지역의 문화는 어떤 성격을 갖는 것일까? 우선 지리적으로 볼 때 중국 신석기문화의 중심인 중원지역의 앙소문화는 너무도 멀리 떨어져있다. 중국은 최근까지 황하 중류의 앙소문화, 산동지역의 대문구문화, 양자강 하류의 하모도 문화를 중국의 3대 신석기문화권으로 받아들여왔다. 그런데 20세기 중반 이후 만리장성 밖인 요서 지역에서 중원의 문화보다 시기적으로 앞서서 발달된 신석기문화가 속속 확인되었다. 특히 기원전 3500년-4000까지 올라가고 대규모 적석총과 제단(祭壇)이 확인된 요하 일대의 홍산문화 우하량 유적지의 발견은 중국 고고학과 역사학계에 큰 충격을 주었다.

 

  1986년 우리나라 신문에 홍산문화가 소개되자, 한국 학계에서는 즉각 이 문화를 고조선의 원류라고 주장하였으나, 문제는 아직까지도 홍산문화를 전공한 전문가는 제대로 없는 상태다. 당시 중국에서는 이 문화를 전설상에 등장하는 삼황오제(三皇五帝)의 것이라고 주장했으나, 우리 학계에서는 말도 안 되는 억지라고 일축해버렸다. 그렇지만 지금 우리에게는 중국에서 요서지역의 신석기문화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지를 잘 살펴보아야 필요성이 커지고 있다.

 

  1971년 내몽고자치주 적봉시 옹우특기에서는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용 모양의 옥기가 발견되었다. 1982년 부신(阜新)시 사해(四海)문화 유적지에서 돌로 쌓아 만든 용 형상물이 발견되지 전까지 중화제일용이라고 이름 하던 곳이었다.

 

 

사해유적에서 발견된 용 형상물. 길이 20m.

  용(龍)뿐만 아니라, 중국과 중국인을 상징하는 각종 상징들이 속속 요하 일대의 신석기 시대 유적지에 발굴되었다. 8,000년 전 흥륭와(興隆蛙) 문화에서 발굴된 화하제일촌(村), 7,600년 전의 사해문화의 중화제일용(龍), 7,000년 전의 조보구 문화에서 발견된 중화제일봉(鳳) 등이 그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요하 유역의 문명을 동이(東夷), 또는 북적(北狄), 더 나아가 예맥(濊貊)의 문명으로 볼 경우 중국 역사의 뿌리는 송두리째 흔들리게 된다. 이런 위기 상황에 대한 대응 논리가 바로 중화문명탐원공정, 동북공정 등을 통해서 이제 구체적인 모습이 드러난 소위 ‘요하문명론’인 것이다.

  요하문명론의 핵심은 요하문명의 주도세력이 황제집단, 보다 구체적으로는 황제의 손자인 고양씨(高陽氏) 전욱(?頊)과 고신씨(高辛氏) 제곡(帝?) 두 씨족 부락이 지금의 하북성과 요녕성이 만나는 유연(幽燕)지역에서 살면서 모든 북방 민족들의 시조가 되었으며, 만주지역 ‘요하문명권’의 핵심인 홍산문화는 고양씨 전욱 계통에 의한 문명이며, 고주몽의 ‘고’씨 성도 고양씨의 후예이기 때문에 붙은 것이라고 해석하고 있다.

 

  중국은 더 나아가 요하문명을 이집트나 수메르 문명보다도 오래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문명임을 밝히려는 거대한 프로젝트를 진행 중인 것이다.

  동북공정 관련 주요 필진 가운데 한사람인 곽대순(郭大順)은 요녕성박물관에서 열리고 있는 『요하문명전』 도록의 머리글에서 중화문명의 시작을 요하 일대의 ‘사해문화’와 ‘홍산문화’에 있다고 강조하고 있다.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지금부터 8,000년 전인 사해문화에서 이미 사회조직이 분화된 것으로 보여주는 위계적으로 배열된 방 유적지가 발굴되었다. 또한 사회적인 분업을 통해서 옥기가 만들어졌다. (옥기는 전문적인 수공업자가 아니면, 쉽게 만들 수 없을 만큼 많은 시간을 들여 만든 제품이다.) 또 의식의 발전 정도를 나타내는 용(龍) 형상물도 드러났다. 그것은 사해문화가 이미 문명의 시작(起步)단계에 들어섰다는 것을 의미한다. 요하문명이 보다 발전한 모습을 나타내는 우하량(牛河梁) 홍산문화 유적에서는,  5,000년 전의 ‘제단(壇), 사당(廟), 무덤(塚)’ 삼위일체의 대규모 종교의례를 상징하는 건축물들과, 용, 봉황, 사람 위주의 위주의 각종 옥기(玉器)들이 발견되었다. 이것은 요하 유역이 ‘문명사회로 진입했다는 중요한 실증들이다.( 郭大順, “序言: ‘遼河文明’ 解”, 遼寧省博物館·遼寧省文物考古硏究所,『遼河文明展 文物集萃』(沈陽: 遼寧省博物館·遼寧省文物考古硏究所, 2006.5). )  

 

‘약 5500년 전에 이미 국가가 되기 위한 모든 조건을 다 구비하고 있는 홍산문화 유적’ 이란 글이 써 있는 우하량 유적지 소개 책자의 한 페이지.

기원전 3,500년 경에 계급이 분화되고, 사회적 분업이 이루어지고, 초기 국가 단계에 진입한 것을 보여주는 놀라운 유적이 요서 일대에서 발견되고 있다. 지금까지는 삼황오제, 또는 환인과 환웅의 신화시대로 여겨지던 이 시대에 이미 초기 국가 단계의 대규모 유적이 드러나고 있다.

  중국은 기존의 앙소문화와 양자강 유역의 하모도 문화를 중화문명의 2대 원류로 보았으나, 이제는 중화문명의 시발점을 홍산문화로 보기 시작하고 있다.

 

  2004년에는 소하서(小河西)문화라고 하여 기원전 8,500년 전의 동북아시아 최초의 신석기 유적까지 소개되고 있다. 이미 신석기 시대에 완벽한 성벽이 등장하고, 놀라운 기술을 갖춘 옥기 제품들이 쏟아져 나오면서 기존의 국가기원론은 물론, 신석기와 청동기라는 시대 구분 자체에 대한 새로운 설정이 필요해지고 있다고 중국학계는 주장을 하고 있다. 예를 들어 ‘옥기 시대’의 설정 등이 그것이다.

 

  하지만 요하문명의 터전인 요서지역은 중국 한족(漢族)의 문화권과는 완전히 동떨어진 곳이다. 뿐만 아니라, 요하문명 시기에 중국과 요서지역은 전혀 관련이 없다. 문헌상으로 볼 때 요하문명은 중국이 아니라, 한국에 더 가깝다. 또한 과거 역사에서도 이 지역과 관련된 이야기도 없다. 그래서 중국인들은 전설로 취급했던 삼황오제 신화를 끌어들이고, 『산해경』과 같은 위작(僞作) 시비가 끊이지 않는 책들마저도 과감히 끌어들여 이 지역의 역사를 중국의 역사로 편입하려고 온갖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중국인의 선조인 황제를 느닷없이 이곳까지 출장(?) 보낸 것이다.

 

  그러나 요하 일대의 유적에서는 중원문화권에서 보이지는 않지만, 한반도에서 보이는 빗살무늬토기, 고인돌, 적석총, 비파형동검, 다뉴세문경 등이 대량으로 출토되고 있다. 강원도 양양군 오산리 유적에서는 흥륭와 유적 등에서 나온 것과 같이 기원전 6천년 전에 나온 빗살무늬토기가 출토되고 있다. 또한 요하문명에서 출토된 옥기들은 요하 동쪽인 수암(岫岩)현에서 나온 것이다. 수암은 단동에서 가까운 곳으로, 고조선과 고구려의 옛 땅이다.

 

요녕성박물관에 전시중인 오제시대 삼대집단 표시.

  그런데 중국은 이러한 요하문명과 만주, 한반도의 연계성을 단절하려고 한다. 1980년대 이후 ‘중국은 통일된다민족국가’ 라는 논리에 입각하여 ‘현재의 중국 국경 안에 있는 모든 민족의 역사는 중국사에 포함한다.’는 새롭게 만들어진 역사관에 의해 중국은 황하문명보다 이르고 발달된 ‘요하문명’을 중화문명의 발상지의 하나로 재정립하고 있다.

  2005년 7월 내몽고자치주 적봉시에서는 홍산문화 국제학술대회가 열렸다. 이때 중국학자들도 홍산문화의 주인공을 예맥족의 문화로 보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학술대회를 통해 중국은 홍산문화를 주도한 ‘황제족의 후예들인 예맥족’이 남하하여 고구려 등을 세운다는 논리를 수립하고 이를 전파하려고 하고 있다.

 

  중국은 이제 이러한 준비를 바탕으로 2006년 6월부터 요녕성박물관에서 요하문명전을 전시하고 있는 것이다. 박물관 3층 5개 전시실 입구에 전시된 오제시대의 3대 집단에 대한 표시는 필자가 2003년에 읽었던『문명의 새벽』책의 내용을 그대로 따온 것이었다. 그 책을 읽었을 때 중국학계가 좀 이상하다고 생각했던 것이, 이제는 분명히 그 의도를 알 수가 있었다.

 

  1전시실은 문명서광(文明曙光)이 주제로, 이 지역의 구석기와 신석기 유적을 통해 요하 유역에서 ‘중화문명’의 첫 번째 서광이 일어났다고 주장하기 위한 전시실이다. 구석기 유적에서부터, 요하문명의 옥기 등이 주로 전시되어 있다. 필자가 가장 열심히 관람했던 곳이다. 앞서 말하였던 사해, 흥륭와, 조보구, 우하량 등지에서 나온 훌륭한 옥기 제품들이 보는 이들의 눈은 현혹시킨다. 요하문명은 고조선사를 비롯한 우리나라 고대사 연구에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앞으로 우리 고대사를 연구하려면 이곳은 반드시 관람해야 할 곳이라고 할 수 있다.

 

  2전시실은 상주북토(商周北土)가 주제로 이 지역이 상·주 시대부터 중원왕조에 속해 있었고, 이 지역의 각 소수민족들은 화하(華夏)민족과는 이미 ‘다원일체(多元一體)’의 관계로 중화민족 안에 들어왔다고 주장하기 위한 전시실이다. 주로 청동기를 비롯한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3전시실에 전시중인 지도. 발해를 독립국이 아닌 발해도독부로 적고 있다.

  중국의 최근 여러 책들에서도 자주 등장하는 ‘상주북토’란 말은 요서와 만주 지역의 역사가 중국사임을 주장하는 근거로 활용되고 있다. 그런데 상(은)나라와 주나라에서 만주 지역을 북쪽의 땅으로 표현했다는 것만으로, 이 지역의 여러 종족들의 역사를 상, 주의 역사로 보아야 한다는 주장은 궁색한 궤변일 뿐이다. 문제는 이런 단어를 학술용어로 활용하는 저들의 사고방식이다. 이러한 억지 논리를 내세울 만큼 중국학계의 고대사 이론에는 논리적 근거가 부족하다. 지금 중국학계는 정치적인 지침에 의해, 중원의 한족 중심적인 편협한 사고를 떨치지 못하고 있다. 중원의 역사만이 우월하며 다른 종족은 그 자체로서의 역사의 가치가 없다는 제국주의적 역사관이 깊게 남아있기에 이와 같은 억지를 부리고 있는 것이다. 

 

  3전시실은 화하일통(華夏一通)이 주제로, 진·한 시대를 기점으로 이 지역이 중원왕조의 판도에 들어왔고, 이 시기에 고구려를 포함한 각 소수민족들이 ‘중국역사상 가장 규모가 큰 민족 대융합’을 통해 중화민족으로 통일되었다고 주장하기 위한 전시실이다. 이곳에 부여, 고구려, 발해의 유물이 전시되어 잇다. 특히 부여의 유물은 적지만, 그래도 볼만하다.

  고구려와 모용선비가 득세하던 시대를 굳이 한족이 통일했다는 시대로 만들기 위해, 요녕성 중심부에서 발굴된 바도 없는 당나라 유물들이 가져다가 전시하고 있다. 이 전시실의 전시 방식은 1940년대 한족의 역사가인 김육불이 『동북통사』에서 주장한 만주 일대와 한족 역사의 연관성을 어떤 식으로든 맺으려는 역사관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래서 이 전시실의 지도는 당나라가 동북지역을 다스렸다는 과장된 지도를 그린다. 그 지도 안에는 발해는 독립국이 아니라, 발해도호부로 표시되어 있다. 이렇게 역사를 함부로 제단해도 되는가? 역사가라면, 역사 앞에서 부끄러움을 느껴야 한다. 그러나 지금 중국은 역사가 없고, 오직 정치 논리만 있는 것 같아 씁쓸하기만 하다.

 

  4전시실은 거란왕조(契丹王朝)가 주제로, 거란족의 거란(후에 요) 왕조는 중국 북방을 통일한 ‘중국’의 왕조라고 주장하기 위한 전시실이다. 거란의 무덤벽화를 재현한 것이 특히 인상 깊다.

  5전시실은 만족굴기(滿族?起)가 주제로, 이 지역에서 만주족이 일어나 전국을 통일한 것이 청나라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

  요녕성박물관의 1층과 2층은 시간 관계상 이번 답사에서는 보지 못했다. 필자로서는 서너 차례의 박물관 답사에서 1층과 2층 전시실을 본 바 있다. 그 가운데 고대화폐전시실과 비지(碑誌)전시실은 꼭 한번 볼만하다.

 

  이미 사진자료를 입수해서 요녕성박물관의 요하문명전의 내용을 파악해 두었지만, 이번 답사를 통해 현지에서 다시 살펴본 것은 필자에게 소중한 경험이 되었다. 중국이 자국의 역사를 확립하기 위해 뛰고 있는데,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에 대한 반성도 해보고, 우리 역사를 앞으로 어떻게 서술하고 정립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도 하는 등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중국이 어떻게 한다고 흥분하기 보다는 철저히 분석하고, 비판하고, 대안을 마련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더 필요함을 알기에, 무거운 마음을 안고서 박물관을 나섰다.

출처 : 우리역사문화연구모임(역사문)
글쓴이 : 김용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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