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사연재글

2007년 소년한국일보연재 28 - 일본열도를 경영한 백제 2

영양대왕 2007. 10. 3. 13:17
일본인 마음에 '혼' 심고 조상의 나라 되다
파견된 관리들 주요 직책 맡아 왜국 경영
최초 사찰 아스카, 저수지 사야마이케 건립


백제를 돕기 위해 왜국의 구원군이 출발한 규슈섬 북쪽의 다이자후. 제2의 사비성이라 불릴 정도로 백제 사비성과 비슷한 점이 많다.

■ 일본 열도에 큰 영향을 끼친 백제

588년 백제 기술자들은 당시 왜국의 수도였던 나라에 일본 열도 최초의 사찰인 아스카지(비조사)를 만듭니다. 593년 부처님의 사리가 담긴 사리함을 탑의 기둥 초석 안에 넣는 행사가 벌어졌을 때에는, 100여 명의 왜국 대신 모두가 백제 옷을 입고 기뻐했습니다.

백제는 왜국에 불교를 전해 준 데 이어 불상, 불교 경전, 스님, 그리고 절을 만드는 기술자를 보내 주었어요. 그렇다고 해도 왜국의 대신들이 모두 백제 옷을 입고 행사에 참여했다는 것은 왜국에 미친 백제의 영향력이 대단했음을 알려줍니다.

현재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탑인 호류지 5층탑은 백제의 정림사지 5층석탑과 닮았습니다. 백제 기술자들이 만든 호류사(법륭사ㆍ일본 나라 현 소재)에는 백제 관음상과 함께 구세 관음상이 모셔져 있지요.

‘성예초’라는 일본 고대 문헌에는 ‘백제 위덕왕이 아버지 성왕의 모습을 그리워하여 만든 것이 구세 관음상이다. 이 관음상은 성왕의 모습을 모방했기에 흐트러진 머리와 그 위에 관을 쓴 모습을 하고 있다.’라는 기록이 있답니다.

성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 만든 구세 관음상이 왜국에 보내진 것입니다. 왜국에서는 성왕을 백제에서 가장 훌륭한 임금으로 알고 있었기에 성왕에 대한 추모가 대단했습니다. 성왕의 모습을 한 구세 관음상이 호류사에 있다는 것은 이 사찰이 백제를 위한 것이거나 백제 사람들과 깊은 관련이 있는 사찰임을 보여줍니다.

익산 입정리고분 출토 금관과 금동 신발(오른쪽 위ㆍ아래)은 일본 후네야마 고분 출토 유물(왼쪽 위ㆍ아래)과 매우 닮았다.

일본 열도의 중심지인 오사카, 나라 지역에는 많은 백제인들이 건너와 살게 되었습니다. 특히 오사카 지역의 백제 사람들은 616년에 다니 강을 막아 저수지인 사야마이케를 만듭니다. 이들은 흙을 다진 뒤 그 위에 흙과 나무, 낙엽을 섞어 넣은 층을 반복해 제방을 쌓았습니다. ‘부엽 공법’이라고 하는 이 방법은 풍납 토성을 쌓을 때도 사용됐어요. 이렇게 만들면 흙이 더 단단해져 거센 물도 막아낼 수 있지요.

사야마이케 덕분에 오사카 지역은 풍요로운 농토로 변했습니다. 이 지역은 백제향 곧 백제 마을이라 불렸답니다. 또 하나의 백제였던 셈이지요.

백제인들이 많이 살게 됨에 따라, 왜국의 건축 문화에도 큰 변화가 생겼습니다. 당시 왜국의 집들은 움집에 가까웠는데, 백제가 기와 제작 기술자를 파견하면서 집의 모양이 변했답니다.

기둥 없이 벽체를 두껍게 한 대벽 건물도 백제의 기술이 전파된 건축 양식입니다. 부엌에서 사용하는 아궁이가 보급되면서 일본 열도의 주방과 음식 문화에도 큰 변화를 가져 왔습니다. 백제는 단지 앞선 문물만 전한 것이 아니라, 직접 사람들이 건너가 살면서 백제와 같은 문화를 가진 왜국을 만들어 나갔던 것입니다.

■ 백제 돕기 위해 구원군 파견하기도

백제의 관리들은 교대로 왜국에 파견되어 정치, 경제, 문화, 외교 등의 분야에서 중요한 직책들을 맡았습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백제의 왕자 가운데 몇몇은 왜국에 가 있다가, 왕이 죽으면 귀국하여 백제왕이 되기도 했습니다. 동성왕, 무령왕, 그리고 의자왕의 아들인 부여풍 등이 그들입니다.

일본에 남아 있는 백제 유적 분포도.(백제 역사 문화관 자료)

일반적으로 장차 왕이 될 사람이 조국을 떠나 다른 나라에 있다면, 왕위에 오르기가 어렵습니다. 그럼에도 백제 왕족들이 왜국에 가있던 것은 일본 열도에 백제의 직접적인 관할 영역이 있거나, 왜국이 백제의 속국이었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굳이 갈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640년 왜국의 서명왕은 백제천 옆에 궁궐을 짓고, 이를 백제 대궁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곧 백제 사람에 의해 왜국 왕실과 국가가 운영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또 ‘일본서기’는 백제가 멸망하자, 왜국 사람들이 서로 모여 “백제의 이름이 오늘로 끊어졌다. 조상의 묘소가 있는 곳에 어찌 또 갈 수가 있겠는가.” 라며 크게 슬퍼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왜국은 백제가 멸망할 때 온 나라의 힘을 기울여 군대를 모아 구원군을 파견하기도 했답니다.

백제는 곧 왜국의 조상의 나라였던 것이지요.


입력시간 : 2007-10-02 13: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