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사연재글

2007년 소년한국일보연재 25회 - 한강유역쟁탈전 2 : 성왕의 슬픈 최후

영양대왕 2007. 9. 4. 16:24

 

[해양 강국 백제를 찾아서] '신라의 변절'로 옛 영화 회복 위한 노력 물거품
국력 키운 성왕, 고구려에 잃은 한강 유역 되찾아
옛 동지였던 신라, 성왕 살해하고 땅도 빼앗아


부여군에 있는 백제 성왕의 동상.

■ 신라와 손잡고 한강 유역 회복한 백제

백제 사람들은 자신들의 고향인 한강 유역을 고구려로부터 되찾으려는 열망이 대단히 강했습니다. 이를 너무도 잘 알고 있던 성왕은 고구려가 약점을 보이는 날을 기다렸지요.

성왕은 도읍을 사비로 옮기고 효율적인 국가 운영을 위해 22 개 관청을 새로 설치했습니다. 또 바다 건너 양나라의 문물을 적극 수용하면서, 왜국에 불교를 전파하는 등 활발한 외교 활동도 펼쳤습니다.

이처럼 국력을 키우며 때를 기다리던 성왕에게 마침내 기회가 찾아 왔습니다. 551년, 고구려에서 왕위 다툼으로 귀족들 사이에 큰 싸움이 일어난 데다, 돌궐이 고구려로 쳐들어 온 것입니다. 고구려가 이처럼 안팎으로 어려움에 처하자, 성왕은 드디어 기회를 얻었다고 생각했답니다. 그래서 당장 신라, 가야의 군대와 함께 고구려의 남쪽 지방을 공격했습니다.

고구려는 북쪽의 돌궐을 막느라 남쪽으로 많은 병력을 보낼 수 없었지요. 백제는 쉽게 한강 유역의 한성을 비롯한 6 개 군을 회복했어요. 이 때 진흥왕이 이끄는 신라도 고구려로부터 지금의 강원도 지역을 중심으로 한 한강 상류의 10 개 군을 빼앗았습니다.

그런데 이 때 문제가 생겼습니다. 고구려가 새로운 작전으로 나온 것입니다. 신라와 새롭게 동맹을 맺고 백제를 견제하자는 전략이었습니다. 오랫동안 고구려에 굴복했던 신라보다는, 계속 고구려와 전쟁을 한 백제를 더 두렵게 여겼기 때문이었지요.

■ 백제에게 등을 돌린 신라

충북 보은에 위치한 삼년산성. 백제 성왕은 이 성 출신의 고우도도에게 목숨을 잃었다.

신라 진흥왕은 비록 영토를 넓히기 위해 백제와 손을 잡았지만, 속으로는 백제가 차지한 한강 하류의 넓은 평야를 갖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고구려와 손을 잡고 552년부터 백제와 가야 군대를 공격하기 시작했습니다.

뜻밖의 적을 만나게 된 백제는 고구려와 신라의 연합군에게 패하기 시작합니다. 552년 말에는 신라가 백제의 수도였던 한성 지역을 차지하기에 이르렀지요. 그러자 성왕은 대가야를 비롯한 가야 군대와 힘을 합해 대항하는 한편, 바다 건너 왜국에게도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하지만 왜국은 무기 지원 정도의 도움만 주었답니다.

553년 10월 백제의 여창(장차 위덕왕)은 대군을 이끌고 가 백합야 전투에서 고구려군을 물리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군사가 부족했습니다. 그래서 거듭 왜국에 사신을 보내 군사를 내놓으라고 요구했습니다. 결국 왜국에서도 수군을 보내 백제를 돕게 되었지요. 이제 전쟁은 고구려ㆍ신라, 그리고 백제ㆍ가야ㆍ왜가 서로 싸우는 큰 전쟁이 되었습니다.

554년 12월, 성왕은 전쟁터에서 군사들을 지휘하는 태자 여창을 위로하기 위해 소수의 군대를 출동시킵니다. 성왕의 움직임을 알아챈 신라는 기습 작전으로 성왕을 붙잡습니다. 그리고 말을 먹이는 노예 혹은 삼년산성의 하급 장교로 알려진 고우도도로 하여금 성왕의 목을 베게 하였습니다.

성왕이 비참한 최후를 맞자, 여창이 이끄는 백제군 또한 크게 당황합니다. 결국 신라 관산성 주변에서 포위되어 3만여 명이 죽는 큰 패배를 당하고 말았습니다. 이 전투 이후 백제는 한강 유역을 신라에게 완전히 빼앗기게 됩니다. 가야 역시 얼마 지나지 않아 신라에 의해 완전히 멸망하고 말았지요.

성왕은 백제의 옛 터를 회복하는 기쁨을 잠시 누리기는 하였으나, 어제의 동지였던 신라가 고구려와 한편이 된 탓에 한강 유역을 빼앗겼습니다. 게다가 신라군의 기습에 목숨마저 잃었지요. 성왕은 백제가 다시 강국이 되기 위해 끝없이 노력했던 백제의 슬픈 영웅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