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사연재글

207년 소년한국일보 연재 26회 - 위덕왕.

영양대왕 2007. 9. 11. 21:52
위덕왕, 외교술로도 왕의 권위 못 찾아
큰 업적 남기려 신라 공격했지만 대패

부소산성 아래에 있는 부여 군북리 왕궁터. 백제 왕들이 살았던 곳으로 여겨진다.

■ 신라의 전성기, 위축되는 백제

백제 27대 위덕왕의 이름은 여창입니다. 아버지인 성왕이 신라군에 의해 비참하게 죽은 뒤 임금이 되었습니다.

그는 매우 용감하고 소박한 성품을 지닌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태자 시절에는 손수 군사들을 이끌고 고구려를 공격하기도 했지요. 백합야란 곳에 요새를 만들고 병사들과 함께 먹고 자기도 했습니다. 당시 백제의 공격을 눈치챈 고구려군이 푸른 산을 덮을 듯이 수많은 깃발을 휘날리며 백제군 앞에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말을 탄 다섯 명의 장수들이 나와 이렇게 외쳤지요.

“우리 들판에 손님이 왔구나. 나와 상대하고자 하는 사람은 성명, 나이, 지위를 말하라.”

그러자 여창 태자가 나서 “고구려와 같은 성씨이고, 지위는 한솔(5위 관등), 나이는 29 세다.”라고 말한 뒤 고구려 용사와 일대 일의 대결을 펼칩니다. 태자는 이 대결에서 승리했고, 전투에서도 고구려군을 크게 무찌르지요.

용감한 여창 태자는 554년 신하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군사를 일으켜 신라를 공격했습니다. 이 때 그를 위로하기 위해 왔던 성왕이 그만 신라군에 의해 살해 당했던 것이지요. 당황한 탓에 태자의 군대마저도 포위되고 맙니다.

여창 태자는 간신히 탈출했지만, 많은 병사를 잃고 말았지요.

부여 부소산성 내에 위치한 창고터로 추정되는 유적지.

일본서기에는 삼국사기와 달리 태자가 2 년 3 개월간이나 임금이 되지 못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심지어 신하들에게 돌아가신 아버지를 위해 스님이 되고 싶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집니다. 신라와의 전쟁에서 패배했다는 책임 때문에, 임금이 되는 것조차 쉽지 않았던 것입니다.

신하들은 여전히 위덕왕에게 힘을 모아 주지 않았습니다. 위덕왕은 패전의 책임에서 벗어날 만한 큰 업적과, 자신을 지지하지 않는 귀족들을 제압할 만한 힘이 필요했습니다.

이런 이유로 위덕왕은 561년 신라를 공격합니다. 하지만 진흥왕이 다스리던 이 시기의 신라는 전성기를 누리고 있었기에 성공을 거둘 수 없었습니다. 위덕왕은 진흥왕이 죽은 다음해인 577년 다시 신라를 공격하지만, 크게 패하고 맙니다.

■ 무력 대신 외교로 힘을 키우려고 노력

위덕왕은 무력 대신 활발한 외교 활동을 통해 백제의 힘을 키우고자 노력합니다. 당시 대륙에는 북제, 북주, 진나라 등 여러 나라가 있었지요. 위덕왕은 이들 나라에 사신을 보내 좋은 관계 맺으려 했습니다.

아좌 태자가 그린 것으로 유명한 쇼토쿠 태자 초상화.

북제를 계승한 수나라가 북주, 진을 멸망시키고 강력한 제국으로 등장하자 수나라를 이용해 고구려를 공격할 계획도 세웁니다. 하지만 백제가 수나라에 사신을 보낸 사실을 안 고구려는 598년 신라와의 국경을 멀리 돌아 백제를 공격했습니다.

신라를 이기지 못하고 도리어 고구려의 침략을 받기까지 한 위덕왕은 차츰 왕으로서의 힘과 권력을 잃어갑니다. 그는 45 년(554~598년)이란 긴 기간 백제를 다스렸지만, 결국 아들에게 왕위조차 물려주지 못하게 되지요.

대신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공을 세운 동생의 아들인 효순 왕자가 권력을 쥐게 됩니다. 효순 왕자는 아버지를 왕위에 앉혀 혜왕(598~599년)으로 만든 지 1 년 만에 자신이 직접 법왕(599~600년)이 됩니다.

위덕왕의 친 아들인 아좌 태자는 당시 왜국에 가 있어 임금이 되지 못했습니다. 아좌 태자는 왜국의 쇼토쿠 태자 초상화를 그려준 것으로 유명합니다. 장차 임금이 되어야 할 태자를 왜국에 보낸 것은 단순한 이웃 나라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위덕왕을 비롯한 백제 임금들이 왜 일본 열도 개척에 많은 정성을 쏟았는지는 다음 회에 알아보겠습니다.


김용만(우리 역사 문화 연구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