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사연재글

2007년 소년한국일보연재 27회 - 일본의 문명을 전한 백제 1

영양대왕 2007. 9. 18. 16:02
미개한 일본에 문명의 빛을 밝히다
왕인 박사, '일본 학문의 조상'으로 꼽혀
철기·옷·술 제조 등 다양한 문물 전해


왕인이 왜국에 학문을 전파해 준 상황을 그린 상상도.

왜국에 다양한 문화와 기술 전파

일본 열도는 산이 많고 해안선이 복잡합니다. 곳곳에는 산에서 내려온 계곡 물을 중심으로 작은 평지도 발달되어 있지요. 이 때문에 큰 나라가 탄생하기 보다는 지역별로 작은 나라들이 활동하기 좋은 조건을 갖추게 됐습니다.

서기 500~600년대 일본 열도의 중심은 나라와 오사카 지역이었답니다. 이곳에 왜국이 있었지만, 일본 전체를 다 지배할 정도는 아니었어요. 그저 가장 큰 나라에 불과했습니다.

일본 열도에서 가장 큰 섬인 혼슈우의 3분의 1 정도와 북쪽의 큰 섬인 홋카이도는 문명화가 되지 않은 아이누족이 살고 있었답니다. 남쪽의 큰 섬인 규슈의 남부 지역도 왜국의 지배를 받지 않았지요.

역사서인 '삼국지'에는 '왜국 남자들의 옷은 단지 가로로 된 천을 묶어서 연결했을 뿐 꿰매는 부분이 없었다. 여자들은 천 중앙에 구멍을 뚫어 뒤집어 쓰는 홑옷을 입었다.'라고 적혀있습니다.

왜국이 서기 500년대 초 양나라에 보낸 사신은 신발도 신지 않은 모습을 하고 있었지요. 일본 열도의 문명 수준이 이렇게 낮았기 때문에, 뛰어난 기술력을 가진 백제를 비롯한 가야, 신라, 고구려 사람들은 일본 곳곳에 정착해 각자 새로운 지역을 개척해낼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 중 가장 열심인 나라는 단연코 백제였습니다. 고구려, 신라와의 전쟁에서 패하면서 한반도에서 역사를 주도할 힘을 잃었기 때문이지요.

동맹국 대가야마저 562년 신라에 멸망하자 군사적 도움을 얻을 수 있는 나라는 왜국뿐이었습니다. 백제가 열심히 사신을 보낸 바다 건너 양자강 유역의 양나라, 진나라 등은 문화와 무역에는 도움이 되었지만, 군사적 도움은 전혀 기대할 수 없었지요.

왜국만이 백제가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침입을 받았을 때인 서기 400년과, 550년대에 도움을 주었습니다. 왜국이 백제에 군사 원조를 해준 것은 앞선 문화와 학문, 기술을 전해 받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나주 왕인 기념관의 왕인 박사 동상.

일본에 큰 영향을 끼친 왕인 박사

왜국에 백제의 문화를 전해준 가장 유명한 사람은 '일본 학문의 조상'이라고 꼽히는 왕인 박사가 있습니다. 왕인은 논어 10 권과 천자문 1 권을 가지고 도공, 야공, 와공 등 기술자들과 함께 왜국으로 건너가 일본 학문의 조상이 된 것입니니다.

그는 우리나라 보다 일본에서 더욱 존경받는 인물이지요. 지금도 오사카 주변에는 왕인과 관련된 유적지가 많이 남아 있답니다.

왕인이 왜국으로 간 시기는 서기 400년 무렵인 근초고왕 또는 아신왕 때라고 합니다. 이 때 학문뿐 아니라, 철기 제작, 의복 만드는 기술 심지어 술 제조법까지 다방면에 걸친 백제 문물이 일본 열도에 전파되었지요.

552∼554년에는 군사 원조를 받기 위해 주역 학자인 역박사, 사서 오경에 뛰어난 오경박사, 의사인 의박사 등을 보내 많은 기술을 전해 주었습니다.

전쟁이 끝난 뒤인 552년에는 불교를 전해주었지요. 처음에는 왜국 고유 신앙인 '신도'를 믿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에 나라의 종교로 수용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당시 왜국에는 백제 8대 귀족의 하나인 목씨 가문의 후손 소아씨가 큰 권력을 잡고 있었습니다. 백제로부터 적극적으로 불교를 들여오고자 노력했지요.

소아씨는 백제에게 왜국에 절을 지어달라고 요청했고, 그 결과 588년 무렵에는 백제의 많은 기술자가 왜국으로 건너갑니다. 그리고 이들에 의해 왜국에는 새로운 백제 열풍이 불게 됩니다.

이 때부터 백제와 왜국과의 관계는 크게 변하기 시작합니다. 다음 회에서도 일본 열도를 경영한 백제를 좀더 알아 보겠습니다.

나주 왕인 기념관에 있는 왕인 박사 관련 일본 내 유적지.


김용만(우리 역사 문화 연구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