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사연재글

2007년 소년한국일보연재 30회 - 서동과 선화공주

영양대왕 2007. 10. 16. 16:14
지혜로운 서동, 선화 공주 사랑 얻고 왕에 오르다
'용의 아이'는 왕·왕족을 나타내… 신라 공주 차지하려 '서동요' 퍼뜨려

서동 출생지로 추정되는 익산의 한 저수지.

■ 마를 파는 아이에서 임금으로

2 년 전 ‘서동요’ 라는 TV 드라마가 방영된 적이 있습니다. 백제의 서동이 신라의 선화 공주와 만나 결혼을 하고, 나중에 백제 30대 무왕이 되었다는 삼국유사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삼았지요.

일연 스님이 쓴 삼국유사에 따르면 서동은 용의 아이입니다. 백제 수도 부여의 남쪽 연못가에 남편이 죽고 혼자 사는 여인이 있었습니다. 이 여인은 어느 날 연못의 용을 만나 자식을 갖게 되었지요.

이 때 태어난 사내아이는 참마를 캐어 내다 팔며 생계를 유지했답니다. 삼국 시대에는 고구마, 감자, 옥수수 등이 없었기 때문에 마는 중요한 간식거리였지요. 그때부터 사람들은 그를 두고 ‘마를 파는 아이’라는 뜻을 지닌 서동이라고 불렀습니다.

서동은 신라 26대 진평왕의 셋째 딸인 선화 공주가 뛰어나게 아름답다는 말을 듣고는 신라로 갔습니다. 그리고는 어린이들에게 마를 주면서 다음과 같은 노래를 부르도록 했지요.

익산 쌍릉의 무왕릉.

“선화 공주님은 남 몰래 정을 통해 두고 서동 도련님을 밤에 몰래 안고 간다.”

이 노래는 흔히 ‘서동요’라고 부르는 신라 최초의 향가입니다. 이 노래가 널리 퍼져 궁궐 안에서도 들리게 되었습니다. 결국 진평왕까지 이 소문을 듣게 되고 선화 공주는 왕의 노여움을 사 궁궐에서 쫓겨나기에 이릅니다.

서동은 자신의 계략이 성공하자, 쫓겨난 공주를 만나 절을 한 뒤 자신이 모시고 가겠다고 말을 합니다. 함께 여행을 하면서 서동과 선화 공주는 곧 서로를 좋아하게 됩니다. 공주는 아이들의 노래가 맞다 여기게 되었지요.

선화 공주는 궁궐에서 가지고 나온 황금을 서동에게 보여주고 이것으로 서동과 함께 살 길을 찾자고 했습니다. 이 때 서동은 황금이 귀한 것이냐며, 자신이 마를 캐는 곳에 황금을 흙처럼 쌓아두었다고 말합니다.

황금의 가치를 몰랐던 서동이 쓸모 없는 돌인 줄 알았던 것이지요. 서동은 황금을 진평왕에게 보내고 곧 사위로 인정받습니다. 신라의 공주를 아내로 맞이한 뒤, 서동은 사람들의 지지를 얻어 백제의 임금이 되었답니다.

■ 서동 이야기에 숨겨진 진실

익산 쌍릉의 선화공주릉.

서동의 이야기는 믿기 어렵습니다. 서동이 선화 공주와 결혼을 했다는 것은 그럴 수 있다고 해도, 어떻게 참마를 캐던 평민이 백제의 임금이 될 수 있었는가 하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이 이야기에 숨겨진 것들을 찾아 볼까요? 먼저 서동의 아버지가 용이라는 대목입니다. 용은 예부터 왕과 관련이 있는 상상 속의 동물입니다. 곧 서동의 어머니가 만난 용은 백제왕이거나, 왕실 사람이라고 추측할 수 있지요.

용은 백제 27대 위덕왕일 가능성이 가장 큽니다. 위덕왕은 매우 용감한 장군이었지만 신라와의 전쟁에서 패했기 때문에 왕이 되어서도 큰 힘을 갖지 못했습니다. 게다가 왕비에게서 낳은 아좌 태자가 있었답니다. 이런 상황에서 위덕왕은 신분이 낮은 여인에게서 얻은 서동을 궁궐 안으로 데려와 키울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전북 익산에 있는 드라마 서동요 촬영장.

서동은 익산 지역에서 재물을 모아 크게 힘을 키웁니다. 서동의 출생지는 익산에 있는 연못 부근이라고 전해져 오고 있으며, 그와 선화 공주의 무덤도 익산에 있는 쌍릉으로 추측됩니다.

598년 위덕왕이 죽은 뒤 그의 동생인 혜왕이 왕위에 오릅니다. 혜왕이 2 년 만에 죽고 혜왕의 아들인 법왕으로 이어지지만, 그 역시 2 년 만에 죽습니다. 아좌 태자는 임금이 되지 못했는데 그 이유는 기록에 남아 있지 않습니다. 그러자 왕실의 혈통을 가진 서동이 600년에 왕위에 올라 30대 무왕이 되었지요.

서동은 임금이 된 귀족 세력에게 억눌리던 왕의 권력을 강하게 만들기 위해 노력합니다. 그는 우선 자신이 힘을 키운 익산 지역을 집중 개발했고, 이 곳은 백제의 새로운 중심지로 떠오르게 됩니다.


김용만(우리 역사 문화 연구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