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사연재글

2007년 소년한국일보연재 - 한강유역쟁탈전 1

영양대왕 2007. 8. 27. 15:32
[해양강국 백제를 찾아서] 성왕, 고구려와 '한강 쟁탈전'서 승리
잃어 버린 옛 땅 되찾으려 왜·신라와 적극적 동맹

한강 일대를 점령한 고구려 군이 머물었던 아차산 3보루 유적

■ 뺏고 뺏기는 한강 유역

서기 475년 백제 개로왕은 고구려의 공격을 받아 목숨을 잃었습니다. 이로 인해 백제는 한성을 포기하고 수도를 웅진, 사비로 계속 옮겨야 했습니다. 넓은 농경지가 있는 풍요로운 한강 유역을 포기한 백제는 이 지역을 다시는 되찾지 못하였을까요?

백제에게 한강 유역은 너무도 소중한 땅이기에 결코 포기할 수가 없었습니다. 501년 왕위에 오른 무령왕은 옛 땅을 되찾으려는 백제인의 소망을 담아 5000 명의 군사를 보내 고구려의 수곡성을 공격했지요. 수곡성은 오늘날의 황해도 신계군 지역이랍니다. 백제는 이때 한강 유역을 되찾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백제는 이후 몇 년 동안 고구려와 잦은 전쟁을 합니다. 특히 위천에서 벌어진 전투에서는 무령왕이 친히 기병 3000 명으로 고구려의 군대를 크게 물리치기도 했습니다. 516년에는 바다 건너 양나라에 사신을 보내, 백제가 다시 고구려를 거듭 물리치고 강국이 되었다며 자랑하기도 했지요.

백제가 한강 유역을 다시 차지했음을 알려주는 것으로 지금의 경기도 일산 고봉산 일대에 전해오는 한씨 미녀와 고구려 안장왕 이야기를 들 수 있답니다.(2004년 10월 8일자 참고)

서울 몽촌토성에서 발견된 고구려 유물. 백제가 한강 유역을 고구려에게 빼앗겼음을 알려준다.

안장왕이 태자 시절, 당시 백제 땅인 고봉산 지역에 왔다가 아름다운 한씨를 만나 사랑을 하게 되었답니다. 그 후 고구려로 돌아가 519년에 임금이 되었지만, 미녀 한씨는 백제의 관리에게 괴롭힘을 받게 됩니다. 이 소식을 들은 안장왕은 그녀를 구하려고 애를 썼습니다. 결국 부하인 을밀 장군의 활약으로 고봉산 지역을 차지하고 그녀와 다시 만났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처럼 백제와 고구려는 한강 일대를 놓고 뺏고 빼앗긴 일이 많았습니다. 523년 무령왕은 지금의 서울 지역인 한성에 직접 가서는 고구려를 막기 위한 쌍현성을 쌓도록 지시합니다.

그 해 5월 무령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성왕은 8월 고구려 군의 공격에 맞서 싸워 크게 물리칩니다. 하지만 529년 고구려 안장왕이 친히 군사를 이끌고 쳐들어오자 여러 성을 빼앗겼습니다. 게다가 좌평 연모가 이끄는 3만의 군대로 고구려군에 맞섰지만, 오곡원 전투에서 패하고 말았습니다. 북한 학계에서는 이 때 고구려가 현재의 대전 지역까지 밀고 내려왔다고 보기도 하지요.

이렇게 다시 고구려에게 밀린 백제 성왕은 수도를 사비로 옮긴 뒤 반격을 시작합니다. 하지만 여러 차례의 전투에서 고구려에게 패하고, 한강 유역을 완전히 되찾지는 못했습니다.

■ 동맹을 통한 고구려와의 전쟁

남한산성에서 바라본 한강 유역의 서울 일대. 삼국간의 치열한 전쟁의 무대였다.

성왕은 단독으로 고구려를 상대할 생각을 버리고 왜ㆍ신라와 적극적인 동맹을 맺어 고구려를 이길 방법을 찾게 됩니다. 547년 성왕은 달솔 진모선문 등을 왜국에 보내 군사 원조를 요청했습니다. 하지만 왜국에서는 군대를 제때에 보내지 못했고, 겨우 화살 1500 개 정도만을 보내주었을 뿐입니다.

반면 548년 독산성 전투에서는 신라의 원군과 함께 고구려군을 물리칠 수 있었습니다. 그러자 성왕은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실질적인 도움이 되는 신라와의 동맹에 큰 기대를 겁니다.

550년 성왕은 고구려의 도살성을 차지했지만, 금현성을 고구려에게 빼앗깁니다. 이 때 신라에서 원병이 왔습니다. 신라군은 고구려를 물리쳐주고, 도살성과 금현성 모두를 신라 병사가 지키도록 했어요. 전쟁의 결과로 따지면 억울한 면이 있었지만, 성왕은 백제의 옛 땅인 한강 유역을 되찾기 위해 신라와 계속 동맹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결국 다음 해 신라와 함께 잃어 버린 백제의 옛 땅을 되찾기 위한 대규모의 전쟁을 일으키게 됩니다.


김용만(우리역사문화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