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사연재글

2007년 소년한국일보 연재 23회 - 백제의 다양한 무덤들

영양대왕 2007. 8. 20. 22:52
후기 무덤 대부분 '굴식돌방무덤'으로 통일
[해양 강국 백제를 찾아서]

굴식돌방무덤.

■ 시대에 따른 무덤의 변화

무덤은 죽은 사람의 시신을 넣어두는 공간입니다. 후손들은 조상의 무덤을 만드는 데 정성을 다하기 마련이지요. 무덤을 만드는 방식은 쉽게 바뀌지 않습니다. 이런 이유로 어떤 지역의 무덤 형태가 달라지면, 그 지역 역사에 큰 변화가 있었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답니다. 백제의 경우 시대와 지역별로 여러 종류의 무덤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이를 탐구해 보면 백제 역사에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 알 수 있겠지요.

백제 건국 이전 한강 유역에 살던 사람들은 땅을 파고 나무나 돌로 널(관)을 짠 뒤 그 안에 시신을 넣는 널무덤(토광묘)을 사용했어요. 그런데 초기 백제 왕들의 무덤은 구덩이나 땅 위에 시신을 넣은 관을 놓고 그 위에 돌을 쌓아 피라미드 모양을 한 돌무지무덤(적석총)이었습니다.

그런데, 석촌동 3호분은 고구려의 무덤 형태와 같습니다. 안에 시신을 넣는 널방을 만들고, 바깥은 네모지게 다듬은 돌로 계단을 이루면서 쌓아 올렸지요. 이는 백제 초기 지배층은 고구려에서 갈라진 사람들이며, 백제가 고구려와 같은 문화를 가졌음을 알려주는 증거입니다.

구덩식 돌방무덤의 형태.

한성 시대 또 다른 무덤 방식은 널길이 달린 돌방 위에 흙을 덮은 굴식돌방무덤(횡혈식설실분)입니다. 이 무덤은 땅에 구덩이를 파고 그 안에 납작한 판돌로 단면이 6각형 형태의 돌방을 만들었다는 점이 특이합니다.

이 밖에 구덩식돌방무덤(견혈식석실분)이 있습니다. 이 무덤은 지표면에 구덩이를 파고, 그 안에 납작한 돌을 쌓아 방을 만들었지요. 땅의 경사진 곳에 구덩이를 파고 널방은 동쪽을 향하게 했습니다.

위는 뚜껑돌로 덮었지요. 이 무덤은 겉으로는 굴식돌방무덤과 비슷하지만 내부에 큰 차이가 있고, 규모나 유물도 굴식돌방무덤에 비해 초라합니다. 백제 시대 지방 사람들의 무덤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백제 후기에는 대부분의 무덤이 백제 지배층을 따라 굴식돌방무덤으로 통일됩니다.

■ 무덤을 통해 알아본 권력의 이동과 유행

독무덤인 영암 초분골 고분.

백제의 무덤 가운데는 독무덤(옹관묘)도 있습니다. 독무덤은 크고 작은 항아리 또는 큰 토기 2개를 맞붙여서 시신을 넣은 형태입니다. 부여 지방에서 발견되는 독무덤은 일상에서 사용하던 항아리를 그대로 쓰기도 했습니다. 이 가운데 주목할 것은 영산강 유역 등지에서 발견된 초대형 독무덤입니다.

이 무덤들은 겉으로 드러난 하나의 무덤 안에 여러 개의 독무덤을 넣습니다. 따라서 겉모습은 공주나 사비 지역 백제왕들의 무덤보다 큰 경우도 있답니다.

굴식 돌방무덤인 부여 능산리 고분. 백제 후기 왕들의 무덤이다.

독무덤을 사용하던 사람들은 백제 이전에 한반도 서부 지역에 살던 마한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백제에 쫓겨 영산강 유역의 나주, 영암 등지에서 살며 자신들의 전통을 지켜 독무덤을 계속해서 사용했던 것입니다. 독무덤은 차츰 백제의 굴식돌방무덤으로 바뀌는데, 이는 곧 마한이 사라지고 백제가 그 지역을 다스리게 됐음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백제 무덤들 가운데 또 하나 주목할 것은 바로 무령왕릉과 같은 벽돌무덤(전축분)입니다. 이 무덤은 공주 지역에만 있고, 그 수가 적으며 시대도 매우 짧습니다. 일시적인 유행을 따른 무덤인 셈이지요.

백제가 공주 즉 웅진에 도읍을 정할 당시는 바다 건너 양나라의 문물을 배우려는 게 유행이었습니다. 양나라 사람들의 무덤 형태가 덩달아 수입된 것입니다. 이렇듯 백제의 다양한 무덤은 백제의 역사가 다양하게 변해 왔음을 보여주는 가장 확실한 증거입니다.

/김용만(우리역사문화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