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사연재글

2007년 소년한국일보연재 22회 - 백제수도 사비

영양대왕 2007. 8. 13. 20:28
사비로 수도 옮기며 나라 이름 '남부여'로 바꿔
요즘 신도시와 비슷한 계획 도시… 삼국중가장 먼저 수도 전체를 성으로 둘러싸

부소산성 반월루에서 바라본 부여읍.

■ 백제, 수도를 두 번 옮기다

백제의 수도는 한성, 웅진, 사비 3 곳이었습니다. 한성은 서기전 18년부터 서기 475년까지 493 년 동안의 수도였고, 웅진은 서기 538년까지 불과 63 년간 수도였습니다. 나머지 122 년 동안의 수도가 바로 사비입니다.

백제가 한성에서 웅진 즉 지금의 공주시로 도읍을 옮긴 것은 고구려 군의 공격을 받아 한성을 빼앗겼기 때문입니다.

웅진은 북쪽으로 금강을 끼고 있고, 주변에는 월성산, 명덕산, 봉황산, 정지산 등이 있어 방어하기에는 매우 유리한 곳이었답니다. 하지만 한 나라의 수도로는 조금 비좁았지요. 그래서 새로운 수도로 사비 즉 지금의 부여 지역을 택해 옮기려는 계획을 세웠습니다.

백제의 성 가운데 명확히 연대가 밝혀진 것은 501년에 건설된 가림성이 유일합니다. 가림성은 금강을 사이에 두고 사비성을 내려다볼 수 있는 곳입니다. 동성왕은 가림성의 중요함을 알고 위사좌평인 백가를 가림성주로 보냈습니다.

하지만 좌평에서 성주로 직위가 떨어진 백가는 동성왕에게 불만을 가졌습니다. 백가는 동성왕이 사비성의 서쪽 들판에서 사냥하다 휴식을 취할 때 사람을 시켜 왕을 죽였습니다. 이 때문에 사비로 수도를 옮기는 일은 백가의 반란을 평정한 무녕왕을 거쳐 성왕 때에야 비로소 이루어집니다.

■ 잘 정돈된 사비, 왕궁터는 부소산성 아래 추정

공산성 동문에서 바라본 공주 시내 전경.

백제는 사비로 도읍을 옮기기 위해 치밀한 준비를 했습니다. 사비는 잘 정비된 도로로 거리가 구분된 철저한 계획 도시였지요. 도시 내에는 남북 방향으로 폭 8.9 m, 동서 방면으로 폭 3.9 m의 도로가 나 있었습니다. 또한 길 사이에는 폭과 너비가 215 m×85 m인 주거 지역이 자리잡았답니다. 마치 요즘의 신도시를 연상케 하지요.

도로는 연꽃 무늬 벽돌이나 자갈로 깨끗하게 포장되었습니다. 도로 양 옆에는 물이 고이지 않도록 도랑을 만들고, 도로가 만나는 지점에는 돌판으로 조립한 지하 배수로도 설치되었답니다. 특히 도시의 북쪽 지역에 있는 왕궁에서 남쪽에 있는 궁남지 연못을 잇는 큰 도로 옆에는 사찰인 정림사를 비롯해서 각종 왕궁 소속 공방들이나 관청 등이 있었지요.

왕궁터는 부소산성 아래에 위치한 군북리 유적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왕궁 뒤쪽에 있는 부소산성은 높이 106 m의 부소산에 흙과 돌을 섞어서 다져 만든 성으로, 둘레가 2.2 km에 이릅니다. 부소산성은 임금이 위급한 경우에 몸을 피할 수 있는 수도 사비의 최후 방어성이었답니다. 부소산성 북쪽은 금강으로, 의자왕 때 3000 명의 궁녀가 투신한 것으로 유명한 낙화암이 있습니다.

수도 사비 방어를 위한 나성.

수도 사비를 보호하기 위해 주변의 부소산과 금성산을 비롯해 금강 주변의 언덕 을 잇는 나성 즉 도시 전체를 보호하는 성을 쌓았습니다. 이렇게 수도 전체를 성으로 둘러싼 것은 백제가 고구려보다 더 먼저 이루어낸 일이었답니다.

수도 사비의 방어를 위해 나성 바깥 남서쪽에 가림성, 북서쪽에 증산성과 울산성, 북쪽에 청산성, 북동쪽에 청마산성, 노성산성, 남동쪽에 득안성과 석성산성 등이 지어졌지요. 사비는 나성과 외곽의 여러 성들에 의해 보호되는 안전한 도시였습니다.

성왕은 사비로 도읍을 옮기면서, 나라 이름을 남부여라고 고쳤습니다. 남부여라고 한 까닭은 백제가 고구려에서 갈라져 나온 나라가 아니라, 부여에서 갈라져 나온 나라임을 선언하는 것이었답니다. 수도를 옮기고, 나라 이름을 바꾼 데서 백제를 새로운 나라, 더 발전하는 나라로 만들겠다는 성왕과 백제 사람들의 의지를 엿볼 수 있습니다.

사비 즉 지금의 부여는 122 년간 백제의 수도로서 찬란했던 백제 문화의 숨결을 진하게 전해주는 역사 도시로 남아 있답니다.


김용만(우리역사문화연구소장)


입력시간 : 2007-08-13 14: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