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사연재글

2007년 소년한국일보 연재 15회 -웅진으로 도읍을 옮기다.

영양대왕 2007. 6. 17. 1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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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양 강국 백제를 찾아서] 서기 475년남쪽 '웅진'으로 도읍 옮기다
장수왕의 고구려군에 '한성' 함락… 새로운 발전 기약

백제의 두 번째 수도였던 공주의 공산성.

고구려 첩자 도림에 속은 개로왕

역사에는 승자가 있으면 패자가 있게 마련입니다. 고구려 20대 장수왕은 백제와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고구려 최전성기를 이룬 임금으로 칭찬을 받습니다. 고구려에게 패해 목숨까지 잃은 개로왕은 어리석은 임금으로 알려져 있지요. 정말 개로왕은 어리석고 못된 임금이었을까요?

백제 21대 개로왕은 455년 왕위에 오른 뒤 20 년간 나라를 다스렸습니다. 그는 임금이 된 뒤의 혼란을 극복하고, 고구려를 먼저 공격했습니다. 개로왕은 472년, 바다 건너 북위에 고구려를 공격하자는 제안을 합니다.

하지만 북위는 당시 막강한 국력을 자랑하는 고구려와 맞서 싸울 의지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백제의 요구를 거절하고, 도리어 백제가 공격할 뜻이 있다는 사실을 고구려에 알려 주었지요.

백제는 북위와 외교 관계를 끊어버리는 것으로 일을 마쳤지만, 고구려는 달랐습니다. 고구려 장수왕은 백제를 공격할 계획을 철저히 세우고 백제에 스님인 도림을 첩자로 보냈어요.

개로왕은 나름대로 백제를 강한 나라로 만들려고 했지만, 한 가지 약점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둑을 무척 좋아한다는 것입니다. 이 점을 노린 도림은 스스로 바둑을 잘 둔다고 소문을 냈습니다.

개로왕은 도림과 만나 바둑을 두게 되었지요. 도림의 뛰어난 바둑 솜씨에 개로왕은 감탄했고, 둘은 금세 친해졌습니다. 개로왕은 도림의 말이라면 무엇이든 믿게 되었습니다.

마침내 도림은 개로왕에게 이렇게 말했지요. "하천 제방을 튼튼히 만들고, 궁궐과 왕의 무덤을 화려하게 해야 주변 나라들이 감히 백제를 얕보지 못 할 것입니다."

개로왕은 도림의 말을 듣고 백성들에게 성을 쌓게 하고, 궁궐과 누각 등을 화려하고 크게 세웠습니다. 한강에서 큰 돌을 캐내어 아버지인 비유왕의 무덤을 새롭게 꾸미고, 한강변을 따라 긴 제방도 만들었어요.

이렇게 큰 공사가 계속되자 나라의 창고는 비게 되었고, 공사에 쓸 비용을 대느라 군사들에게 필요한 무기와 식량마저 부족해졌습니다. 백성들은 농사 지을 시간조차 없었지요. 결국 임금에 대한 불만을 드러내놓기에 이릅니다.

고구려에 돌아온 도림으로부터 이 소식을 들은 장수왕은 즉시 군대를 보내 백제를 공격했습니다. 백제 군사들은 싸울 힘이 부족했고, 백성들도 적극적으로 고구려군과 싸울 생각을 하지 않았어요. 고구려군은 아주 쉽게 백제의 수도인 한성을 포위합니다. 개로왕은 그 때서야 도림에게 속은 것을 알게 되었지요.

몽촌토성에서 발견된 고구려 토기. 고구려군이 백제의 수도를 점령하고 한 동안 머물렀음을 보여준다.

수도 잃은 백제

개로왕은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성을 굳게 지키면서 문주 태자에게 백제가 다시 살아날 방법을 찾으라고 지시했습니다. 고구려군은 한성의 북성(풍납토성)을 쳐서 7 일 만에 함락시키고, 곧바로 남성(몽촌토성)을 공격합니다.

개로왕은 도망을 치다가 고구려군에게 붙잡혀 결국 한강 건너 아차산에 있는 아단성으로 끌려가 처형되고 말았습니다. 개로왕은 백제를 다른 나라가 넘보지 못 하는 강성한 나라로 만들려고 했고, 고구려를 이기기 위해 외교적인 노력도 기울였던 임금입니다. 그러나 도림이 첩자인 줄 몰랐던 탓에 실패한 임금이 되고 만 것이지요.

한편 문주 태자는 신라로 가서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신라는 백제에게 군사 1만 명을 지원합니다. 하지만 문주가 돌아왔을 때에는 이미 백제의 수도는 고구려 군에게 함락되었고, 개로왕은 죽임을 당한 뒤였지요.

문주는 할 수 없이 수도를 남쪽인 웅진(현재 공주군)으로 옮겼습니다. 서기 475년에 이르러서야 현재의 충남 공주시가 백제의 수도가 된 것입니다. 이제 백제는 웅진에서 새로운 발전을 할 준비를 하게 됩니다.


김용만(우리역사문화연구소장)


입력시간 : 2007-06-17 16: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