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사연재글

2007년 소년한국일보 연재 6 - 석촌동 백제고분군

영양대왕 2007. 6. 12. 14:11
[해양강국 백제를 찾아서] 백제 초기 매장 문화 석촌동 '고분공원'
적석총 비롯한 80여 기 무덤 중 8기 남아
백제 왕실, 고구려 무덤 방식 따라 차츰 토착민 전통 풍습도 받아들여


●장수 왕릉보다 규모 큰 '3호분'

서울 송파구 석촌동에는 백제 초기에 만들어진 무덤들이 남아 있습니다. 1917년에는 돌을 쌓아올린 60 기 이상의 적석총을 비롯해 흙으로 쌓은 무덤까지 80 기가 넘는 백제인의 무덤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주변에 건물이 들어서면서 무덤들은 파괴되었고, 지금은 8 개만이 남아 석촌동 백제고분공원 안에서 보호되고 있습니다.

비록 그 수가 많이 줄었지만 백제 무덤들은 백제인의 매장 풍습과 문화를 우리에게 알려 줍니다.

석촌동 백제고분공원에서 가장 큰 3호 무덤은 길이 55.5 m·높이 4.5 m에 이릅니다. 부서지고, 허물어진 탓에 높이는 고구려의 장수왕릉(장군총)보다 낮지만, 규모는 장수왕릉을 능가합니다. 왕의 무덤이 확실하며 만들어진 시기는 대략 서기 300 년 이전의 백제 초기로 추정됩니다.

석촌동 4호 무덤으로 겉모습이 고구려 적석총과 닮았다.

무덤은 장수왕릉처럼 돌을 쌓아 만들었습니다. 꼭대기로부터 약간 아래쪽에 시신을 넣는 방이 있는 내부 구조도 같습니다. 백제는 고구려에서 온 사람들에 의해 건국되었기 때문에, 왕의 무덤을 쌓을 때도 고구려의 방식을 따랐습니다.

3호 남쪽에 있는 4호 무덤 역시 길이가 30 m나 됩니다. 겉모습은 고구려의 적석총을 닮았습니다. 그런데 무덤을 발굴하고 보니, 쌓는 방식은 달랐습니다. 흙을 다져 무덤 안쪽을 만들고, 바깥에 돌을 쌓아올린 것입니다. 백제 방식으로 변화된 무덤이라 할 수 있습니다.

길이가 25 m 정도인 2호 무덤 역시 고구려의 적석총에서 벗어나 안에 흙으로 구덩이를 만들고 나무 관을 넣어 두는 방식을 사용했습니다.

●고구려인과 토착민 한데 어우러진 문화

석촌동 5호 무덤은 돌이 아니라, 흙으로 쌓아올려 만든 무덤입니다. 안에는 시신을 넣기 위한 여러 개의 구덩이와 큰 항아리인 독널이 있습니다. 항아리에 시신을 넣어 두는 이 같은 형태의 무덤은 한강보다 훨씬 남쪽인 영산강 유역의 나주 지역에서 많이 발견됩니다.

이 무덤에 묻힌 사람들은 고구려에서 내려온 사람들이 아닙니다. 즉, 이들은 소서노 일행이 한강 일대로 오기 전부터 이 곳에 살던 사람들의 후손이었습니다. 5호 무덤은 앞의 3·4호 무덤보다 규모가 작은데, 이는 무덤의 주인이 왕이 아니라 토착 귀족임을 알려 주는 증거입니다.

이들은 백제 왕실이 고구려 방식의 무덤을 사용함에도 불구하고, 전통적인 무덤 제작 방식을 지킴으로써 자신들의 힘이 강하다는 것을 드러내고자 했습니다.

가장 규모가 석촌동 3호 무덤.

석촌동 백제 초기 무덤들은 고구려에서 내려온 소서노의 후손들이 백제를 다스렸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 줍니다. 하지만 왕들은 한강 유역에서 오래 전부터 세력을 지녔던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백제를 다스렸고, 그들의 무덤 만드는 풍습도 받아들였습니다.

즉, 백제는 북쪽 고구려에서 내려온 사람들과 한강 유역 토착민이 함께 힘을 모아 나라를 세우고 발전시킨 것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시간이 차츰 지나면서 무덤을 비롯해 고구려와는 다른 백제만의 문화를 만들어 냈습니다.

백제에 관한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는 이러한 무덤들은 부주의로 인해 많이 훼손되었습니다. 이제부터라도 남아 있는 유물들을 잘 보호해서 먼 훗날 백제사가 잘 전해질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김용만 우리역사문화연구소장


입력시간 : 2007-04-08 15: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