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사연재글

2007년 소년한국일보 연재 17회 - 무령왕릉

영양대왕 2007. 7. 2. 10:46
[해양 강국 백제를 찾아서] 무령왕릉, 수준 높은 백제 문화의 참모습
충남 공주서 108종 2906개다양한 유물 발굴

●무덤 양식·재료… 외국과의 잦은 왕래 증명

25대 무령왕은 백제 발전을 위해 큰 업적을 남긴 분입니다.

무령왕이 유명해진 것은 1971년 공주 송산리 6호 무덤의 배수시설 공사 중 우연히 그의 무덤이 발견되었기 때문입니다.

무령왕릉은 백제 무덤 가운데 주인공이 누구인지를 확실하게 알 수 있는 유일한 무덤입니다. 도굴되지 않은 상태로 발굴되어 더욱 가치가 있지요.

무령왕릉에서 나온 은팔찌.

무덤은 벽돌로 만들어졌습니다. 바닥부터 4단까지는 가로 쌓기를, 5단은 세로로 세우는 방식을 반복해 벽을 쌓았지요.

무덤 안쪽 관을 넣는 널은 길이 2.9 m, 너비 1.04 m, 높이 1.45 m이며, 무덤방은 길이 4.2 m, 폭 2.7 m, 높이 3.1 m입니다.

외부에는 돌과 회를 섞은 흙을 이용해 둥글게 무덤을 쌓아 웅장하게 보이도록 했지요. 무덤 안에는 5 개의 불을 밝힐 수 있는 등감을 설치했습니다.

그 아래에는 창살 모양의 벽돌을 배열하여 집에 들어온 것처럼 포근한 느낌을 주도록 만들었지요. 벽돌 무덤을 만드는 것은 남중국의 여러 나라 특히 양나라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 생각됩니다. 이는 백제가 남중국의 나라들과 바다를 건너 잦은 왕래를 했다는 것을 증명해주고 있습니다.

왕과 왕비의 시신을 감쌌던 11 조각의 널빤지 즉 목관의 재료는 당시 한반도에서는 자라지 않는 금송입니다. 이 나무는 일본열도 남부 지방에서만 볼 수 있는 종으로, 키 수십 m에 지름이 두세 아름을 훌쩍 넘게 자랍니다.

판자를 만들어 놓으면 연한 황갈색을 띠어 고급스럽습니다. 잘 썩지 않고 특히 습기가 많은 곳에서 오래 견뎌 목관의 재료로는 최상품입니다. 따라서 일본 왕궁의 기둥을 비롯, 고급 관리나 임금의 시신을 넣는 관의 재료로 사용됐습니다.

1971년 무령왕릉 발굴 당시에 출토된 나무로 만든 관.

이렇게 좋은 나무였기에 무령왕릉의 목관 재료로 선택되었던 것입니다.

목관의 재료를 조사한 연구자에 의하면 판자를 만들기 위해 나무를 베어낼 당시 나무 지름은 150 ㎝, 수령은 300 년이 넘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잘 자란 나무는 일본의 오사카 주변의 고야산에서 나왔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 나무는 배에 실려 오사카에서 후쿠오카를 잇는 좁은 해협을 통해 한반도 남해안으로 들어온 뒤, 금강 하구를 거쳐 공주까지 운송해 왔던 것입니다.

목관의 재료인 금송은 무령왕이 지배할 당시 백제가 왜국(일본)과 활발한 교류가 있었음을 무엇보다 잘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기술자를 우대했던 백제

무덤 안에서는 널길(무덤 입구에서 관을 넣은 방에 이르는 길)을 지키는 돌짐승을 비롯해, 왕과 왕비의 머리관 장식 1 쌍씩과 금귀고리, 금동 신발, 청동 거울, 백자 등잔, 목긴 자기병, 관을 장식한 금제 액세서리 등 다양하고 수준 높은 유물 108종 2906 개가 발견되어 뛰어난 백제 문화의 참모습을 보여줍니다.

이 가운데 지름이 14 ㎝ 되는 왕비의 은팔찌는 바깥쪽에 두 마리의 용이 생동감 있게 새겨진 아름다운 금속 공예품입니다. 은팔찌는 높은 예술적 가치뿐만 아니라, 안쪽에 새겨진 글씨 때문에 주목 받았습니다.

“경자년 2월에 다리가 대부인을 위해서 230주(당시 은을 세는 단위)를 들여 만들었다.”라는 글귀가 있어, 520 년 다리라는 기술자가 대부인인 무령왕비를 위해 만든 것임을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이지요.

다리는 삼국 시대 공예품을 만드는 기술자 가운데 이름이 알려진 유일한 경우입니다. 기술자의 이름이 공예품에 새겨진다는 것은 백제가 기술자를 존중했음을 잘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지요.

무령왕릉은 이처럼 백제의 수준 높은 기술을 잘 보여주는 문화 유산입니다.

충남 공주시에 있는 무령왕릉의 내부 모습.


입력시간 : 2007-07-01 15: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