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사연재글

2007년 소년한국일보 11회 - 백제에 가려진 마한의 역사

영양대왕 2007. 6. 12. 14:15
백제에 가려진 '마한의 역사'
멸망 후에도 독자적 세력과 100 년이상 문화 발전 시켜

대형 항아리 옹관.

●삼국과 더불어 500년 이상을 함께하다

고구려ㆍ백제ㆍ신라가 함께 존재했던 시기를 삼국 시대라고 합니다. 그러나 삼국 시대라 하여 3 개의 나라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이들 세 나라와 더불어 500 년 이상 시대를 함께 했던 가야와 부여 그리고 마한이 있었습니다.

마한의 역사는 고조선이 멸망하기 전부터 시작되었지요. 마한은 54 개의 작은 연맹체로 이뤄졌으며, 특히 12 개 소국 연맹체인 진한ㆍ변한과 더불어 삼한으로 불렸습니다. 마한 연맹체를 대표하는 마한왕은 삼한 전체를 이끌기도 했습니다.

고조선의 유민들이 남쪽으로 내려오자 마한왕은 동쪽 땅을 떼어주어 이들이 살 수 있게 도왔습니다. 신라는 이들 고조선 유민이 세운 나라인 진한의 사로국에서 탄생했습니다. 삼국사기에는 신라가 건국 초기 마한왕에게 복종했다는 기록이 실려 있습니다. 백제 역시 초기에는 마한왕에게 머리를 굽혔습니다.

진한은 신라로, 변한은 가야 연맹으로 변해갔지만, 삼한 가운데 가장 힘이 셌던 마한은 도리어 백제의 공격을 받아 약해졌습니다. 한강 유역을 빼앗긴 마한은 이후 금강에서 영산강 유역까지 밀릴 정도로 세력이 약해졌습니다. 그러다가 369년 왜국의 용병까지 고용한 백제군의 공격을 받아 멸망한 것으로 알려져 왔습니다.

●대형 옹관묘 등 오랜 기간 고유 문화 유지

나주 신촌리 9호분에서 출토된 높이 25.5 cm의 금동관(국보 295호).

하지만 마한이 369년 이후에도 계속 존재했다는 주장이 최근 설득력을 얻고 있습니다. 영산강 주변인 전남 나주시 반남면의 무덤 무리를 발굴해보니 한반도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대형 항아리로 만든 옹관묘가 나왔습니다. 항아리 2 개를 연결해 시신을 넣어둔 옹관묘는 하나의 무덤 안에서 여러 개가 함께 발굴됐지요. 길이가 3 m, 무게는 500 ㎏이나 나가는 항아리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대형 독을 만들려면 매우 뛰어난 기술이 있어야 합니다. 다른 지역에도 옹관묘가 출토됐지만, 대개는 어린이가 들어갈 만한 작은 항아리였지요. 현재까지 나주ㆍ영암ㆍ함평군 등지에서 발굴된 대형 옹관묘는 약 120 기 정도입니다. 옹관묘는 3세기부터 시작해 5세기에 크게 유행하다가, 6세기 중반에 사라집니다.

전문가들은 대형 옹관묘를 만들었던 조상들이 마한 사람일 것으로 추측합니다. 그렇다면 영산강 유역의 마한 세력이 369년에 멸망한 게 아니라, 6세기 중반까지 존재했다고 볼 수 있는 것이지요. 나주 반남면 신촌리 9호분은 8 개의 옹관이 함께 묻힌 대형 무덤으로 화려한 금동관이 함께 출토되었습니다. 이로 미루어 무덤의 주인은 마한의 임금일 것이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초기 마한의 대표적인 유적인 광주 신창동 유적에서는 2000 년 전 나무로 만든 옻칠한 수레바퀴 부속품이 출토된 바 있습니다. 이 밖에 10 줄의 현악기도 발굴되었지요. 마한은 옻칠을 한 화려한 수레를 타고 악기를 연주할 정도로 문화가 발전한 나라였던 것입니다. 오랜 전통과 역사를 가진 마한이 그렇게 쉽게 멸망하지는 않았으리라 짐작되는 대목이지요.

대형 옹관묘가 발굴된 나주시 반남면 고분군.

마한은 백제 근초고왕의 공격을 받아 겉으로는 굴복했지만, 여전히 독자적인 세력과 문화를 100 년 이상 발전시켰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마한의 지배자들도 차츰 백제의 관직을 받고 완전한 백제 사람으로 변하게 됩니다.

삼국 시대에 너무 익숙해진 우리는 지금까지 마한이라는 또 하나의 역사를 잊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백제에 가려진 마한의 역사도 계속되는 유물 발굴로 서서히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지요. 백제와 마지막 100 년 이상을 함께했던 마한의 역사도 소중히 기억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김용만(우리역사문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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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시간 : 2007-05-13 15: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