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사연재글

2007년 소년한국일보 연재 4회 - 백제시조 온조왕, 한강유역에 자리잡다

영양대왕 2007. 6. 12. 14:07
[해양 강국 백제를 찾아서] 백제의 시조 온조왕, 한강 유역에 자리잡다
처음 한강 북쪽 하북 위례성에 정착… 하남 위례성으로 도읍 옮긴후큰나라로 발전

지난 호에서는 백제 시조에 비류왕도 포함된다는 주장에 대해 소개했지요. 오늘은 일반적으로 알려진 백제의 시조 온조왕에 대해 알아 보겠습니다.

한강 주변의 이점으로 전쟁 잦아

하남시 미사동에서 발견된 백제 초기에 만들어진 밭 유적.

바다가 주는 이점을 이용하기 위해 해안가인 미추홀에 도읍을 정한 비류왕과는 달리, 온조왕은 한강 유역인 위례성에 도읍을 정했습니다. 강을 끼고 있어 농사짓기에 알맞고 주변의 여러 작은 나라들과 교역을 하며 큰 이익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삼국사기'는 그가 매우 많은 일을 한 뛰어난 임금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온조왕은 먼저 이웃한 적으로부터 백성들을 안전하게 지키는 일을 시작했습니다. "북쪽 땅과 잇닿아 있는 말갈족은 사나운 종족이며, 거짓말도 많이 하므로 우리의 위협이 되고 있다. 마땅히 무기를 손보고 곡식을 저축하여 방어할 계획을 세워야겠다."라고 명합니다.

한강 주변은 이점이 많기는 하지만, 그만큼 땅을 노리는 적들도 많았기 때문입니다. 백제를 위협하는 나라는 말갈과 낙랑, 마한이었습니다. 이 가운데 말갈은 오늘날 강원도나 경기 동북부 지역에서 살던 무리를 말합니다.

만주 지역에서 활동하던 말갈과는 다른 종족인 '동예'로 보기도 합니다. 말갈은 때로 백제의 수도인 위례성까지 포위하는 등 아주 위협적인 존재였습니다.

온조왕은 여러 차례 말갈의 공격을 막아 냈지만, 잦은 전쟁 때문에 백성들이 편히 살기가 어렵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로 인해 기원전 5년 한강 북쪽인 하북위례성(지금의 서울 중랑천 일대)을 떠나 한강 남쪽의 하남위례성(지금의 서울 동남부 지역)으로 도읍을 옮기게 됩니다.

백성의 안전 위해 도읍을 옮기다

송파구 방이동에 있는 몽촌토성의 목책 사진. 백제 초기에는 나무로 성채를 만들어 사용했다.

온조왕은 도읍을 옮긴 뒤에도 한강 북쪽에 성을 쌓고 그 지역을 계속 관리합니다. 말갈족 추장 소모가 쳐들어오자, 임진강에서 맞서 싸운 끝에 그를 붙잡아 마한으로 보내버립니다.

당시에는 마한이 백제보다 훨씬 큰 나라였기 때문에 수도를 한강 남쪽으로 옮길 때나 전쟁에 승리할 때도 마한왕에게 보고해야 했기 때문이지요. 마한은 54 개의 작은 나라들이 뭉친 연맹체였습니다. 그 가운데 가장 힘이 센 목지국의 왕이 마한을 대표하는 마한왕으로 불렸습니다.

그런데 '삼국사기'에는 온조왕이 하남위례성으로 도읍을 옮길 당시 백제의 영토가 북쪽은 예성강, 남쪽은 안성천, 동쪽은 춘천에 이른다고 적혀 있습니다.

서기 8년에는 마한을 쳐서 그 땅을 빼앗고, 마한을 멸망시켰다고도 합니다. 또 마한의 부흥군을 물리치고, 서기 18년에 지금의 전북 정읍시 지역에 성을 쌓았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내용이 모두 사실이라면, 백제는 나라가 세워진 지 얼마 되지 않아 경기도와 충청도·전라도 지역을 포함하는 큰 나라로 발전한 셈입니다. 하지만 학자들은 이 기록을 그대로 믿지는 않습니다. 백제의 초기 기록은 후대의 백제인에 의해 많은 부분이 고쳐졌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서기 280년 경에 씌어진 '삼국지'에는 백제국은 마한의 한 나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삼국지를 쓴 진수라는 사람이 백제가 마한을 멸망시킨 사실을 모르고 옛일을 적었을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고고학자들은 백제가 적어도 3세기까지는 마한을 멸망시켰다고 볼 수는 없다고 주장합니다.

아무래도 후손들이 나라를 건국한 왕의 업적을 과시하기 위해 뒷날에 생긴 일을 온조왕의 업적으로 기록했다고 보는 것이 더 옳겠지요.

다음 호에서는 온조왕 때의 백제가 어느 정도 발전한 나라였는지 하남위례성으로 추정되는 풍납토성을 통해 알아 보겠습니다.


김용만 우리역사문화연구소장


입력시간 : 2007-03-25 17: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