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사연재글

2007년 소년한국일보연재 14회 - 백제 신라, 왜와 동맹맺다

영양대왕 2007. 6. 3. 21:33
고구려 견제 위해 연합 세력 강화
왜국과의 동맹 더욱 굳건히… 송·신라와도 친밀한 관계로

백제가 한성에 도읍을 정할 당시의 중요한 성인 이성산성 터. 이성산성은 수도의 방어와 종교적 행사를 담당했다.

비유왕, 고구려에 간섭받던 신라와 동맹

고구려군에게 연거푸 패배했던 백제의 아신왕이 405년에 죽었을 때, 태자인 전지는 왜국에 있었습니다. 왕위를 이어받아야 할 태자가 왜국에 있다는 것은 큰 문제가 아닐 수 없었지요.

아신왕의 동생 훈해는 임시로 나라를 다스리며 전지 태자의 귀국을 기다렸습니다. 하지만 막내인 혈례가 형 훈해를 죽이고 왕위를 빼앗아 버리는 사건이 일어납니다.

전지는 아버지의 사망 소식을 듣고 급히 귀국하려고 했습니다. 왜국 왕은 병사 100 명을 호위병으로 보내주었지요. 전지가 백제 땅에 도착하자, 수도인 한성 사람 해충이 혈례가 왕위를 차지한 소식을 전했습니다.

아직 때가 아니라고 생각한 전지는 강화도로 추정되는 섬에서 기다렸고, 얼마 지나지 않아 신하들이 혈례를 죽이고 그를 왕으로 맞이하게 됩니다.

그런데 전지왕이 임금이 되는 과정을 살펴보면, 왜국의 힘이 개입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고구려에 함께 대항한 동맹국이었던 만큼, 전지왕은 왜국과의 관계를 더 친밀하게 하고자 했습니다.

왜국은 사신을 통해 귀한 구슬인 야명주를 바쳤고, 백제는 그 답례로 비단 14 필을 보냈습니다. 백제는 그 뒤 다양한 문화를 왜국에 전수하면서 동맹을 굳건히 합니다.

하지만 백제는 왜국과의 관계만으로는 고구려에 대항할 수 없다고 판단합니다. 420년 전지왕의 뒤를 이은 구이신왕 시절에는 양자강 주변에 있던 송나라에 자주 외교 사신을 보냈습니다. 송과의 외교로 고구려를 견제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427년, 왕위에 오른 비유왕은 오랫동안 전쟁을 치러왔던 신라와의 관계를 변화시킵니다. 433년 신라에 사신을 보내 화친을 청한 것이지요. 신라도 이 제안을 받아들입니다.

백제는 다음해 2월과 9월에 각각 말 2 필과 흰색 매를 신라에 선물로 보냈지요. 그러자 신라에서도 10월에 황금과 야명주를 보내 화답을 했습니다.

당시 신라는 고구려의 간섭을 받고 있었습니다. 400년 신라에 쳐들어온 왜군을 물리쳐준 고구려가 병사를 신라의 수도에 오랫동안 주둔시키고 있었던 것이지요.

하지만 신라는 고구려의 간섭으로부터 벗어나기를 원했고, 이를 눈치 챈 백제가 먼저 적극적으로 동맹을 맺자고 청한 것입니다. 어제의 적이 오늘의 친구가 된 셈이지요.

신라와의 동맹은 455년에서야 그 효과를 보았습니다. 고구려가 백제 북쪽을 공격해오자, 신라에서 군사를 보내 도와준 것입니다. 이로써 백제는 동쪽 국경에 적이 아닌 친구를 두게 되었고, 고구려와 다시 상대할 힘을 얻게 됩니다.

백제 시대 성 유적지 가운데 비교적 원형이 잘 남아 있는 이성산성의 저수지.

외교 통한 국력 강화… 귀족층 내분으로 다시 위기

백제는 외교를 통해 국력을 키우려고 했지만 문제가 생겼습니다. 바로 비유왕의 죽음이었습니다. 삼국사기에는 455년 9월에 흑룡이 한강에 나타났는데 잠시 안개가 끼어 캄캄하더니 날아가 버렸고, 곧 비유왕이 죽었다고 했습니다. 이런 이상한 조짐이 있은 뒤 왕이 죽고, 비유왕의 장자가 왕위를 이어받았습니다. 바로 개로왕이지요.

그런데 놀라운 것은 비유왕의 시신이 21 년 동안이나 빈 들판에 임시로 묻혀 있었다는 점입니다. 왕으로서 아버지의 무덤조차 오랜 기간 제대로 만들지 못 했다니 이상한 일입니다.

475년 고구려가 백제에 쳐들어왔을 당시 고구려 군의 앞장을 섰던 재증걸루와 고이만년 등은 원래 백제의 최고위층 귀족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비유왕이 죽은 뒤 고구려로 탈출을 했어요. 이는 개로왕이 임금이 될 때 백제 귀족층에 큰 내분이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이러한 내분 때문에 백제는 다시 강성해지지 못하고, 위기를 맞이하게 된 것이지요. 결국 개로왕은 고구려로 옮긴 옛 백제의 귀족들에게 전쟁 중 아차산으로 끌려가 죽임을 당하기까지 합니다.


김용만(우리역사문화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