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사연재글

2007년 소년한국일보연재 13회- 백제 위기를 맞다.

영양대왕 2007. 5. 27. 17:23
계속되는 혼란… 백제, 큰위기 맞다
아신왕, 고구려와의 전투서 잇달아 패배… 396년광개토 대왕에 항복 '수모'

고구려의 입장에서 백제와의 전쟁을 기록하고 있는 광개토대왕릉비.

●침류왕·진사왕의 죽음 등 혼란거듭

근초고왕과 근구수왕 시기 전성기를 맞이했던 백제에도 위기가 닥쳤습니다. 불교를 받아들였던 침류왕이 왕위에 오른 지 2 년도 못 돼 세상을 떠난 것입니다. 아들인 아신 태자는 너무 어려 왕이 될 수 없었고, 결국 왕의 동생인 진사가 먼저 왕이 되었습니다.

진사왕은 매우 용맹하고 총명한 임금이었다고 합니다. 그는 장군 진가모를 전쟁터로 보내 고구려의 도압성을 함락시키는 등 나라를 잘 다스렸습니다. 하지만 392년 고구려 광개토 대왕과 만난 것은 그에게 큰 불행이었습니다.

진사왕은 고구려 4만 대군을 맞이하여 성을 10 곳 넘게 빼앗겼습니다. 한 차례 전투에서 패배하자 고구려군과 맞상대하지 못하고 방어에만 급급하다 한강 북쪽의 여러 부락까지 잃고 만 것입니다.

백제의 중요한 해안 방어성인 관미성마저 함락당했지요. 이런 상황에서 진사왕은 구원이란 곳에 사냥을 나갔다가 의문의 죽임을 당합니다. 그리고 침류왕의 태자였던 아신이 392년 왕위에 올랐습니다. 역사학자들은 아신이 진사왕의 죽음과 관계가 있었을 것으로 의심하고 있습니다.

20 년 전 백제에게 패했던 고구려가 거듭 자기 혁신을 하며 국력을 키워 발전하는 동안, 백제는 침류왕과 진사왕의 죽음 등 혼란한 상황이 계속되었습니다.두 나라의 전쟁은 싸우기도 전에 이미 승부가 났던 셈이지요.

야심만만했던 아신왕은 고구려와의 전쟁을 준비했지만, 결과는 비참했습니다. 아신왕은 뛰어난 장군 진무와 함께 1만 백제군을 이끌고 고구려를 공격하여 석성 등 5 개 성을 되찾고 관미성을 포위했습니다. 하지만 식량 보급로가 끊어져 관미성을 되찾지는 못했습니다.

아신왕은 잇따른 고구려와의 전투에서 졌습니다. 394년 수곡성 전투에서 패배한 뒤 1 년 만인 395년 패수(예성강) 전투에서는 광개토 대왕이 지휘하는 7000 명의 군대에게 무려 8000 명이 죽기도 했습니다.

이를 만회하기 위해 아신왕은 직접 군사 7000 명을 거느리고 예성강을 건넜지만, 큰 눈보라를 만나 많은 병사들이 얼어 죽는 바람에 그만 돌아와야 했습니다.

결국 396년 고구려의 공격을 받아 수도가 포위되자 아신왕은 광개토 대왕에게 영원토록 복종하겠다며 항복을 비는 수모를 당하고 말았습니다. 이 때 백제는 58 개 성, 700여 촌락을 빼앗기고, 노비 1000 명, 베 1000 필을 고구려에 바쳤습니다. 왕의 동생과 신하 10여 명도 인질로 끌려가야 했습니다. 그러나 진심으로 굴복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굴복 후에도 끊임없이 고구려에 대항

백제가 고구려에게 빼앗겼던 아단성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되는 아차산. 고구려군은 백제 수도 맞은편까지 쳐들어왔다.

아신왕은 고구려에 대항할 준비를 다시 시작했습니다. 397년 아신왕은 태자인 전지를 왜국에 인질로 보내면서까지 왜국의 군사를 빌려옵니다. 삼국사기에는 아신왕이 398년과 399년 고구려를 공격하기 위해 군사를 계속해서 모았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400년에 백제는 왜국과 가야의 군사를 동원해 고구려와 손을 잡은 신라를 먼저 공격합니다. 이들 군대는 신라를 돕기 위해 출정한 고구려 5만 대군에게 크게 패하고, 아신왕은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역전할 기회를 얻지 못합니다.

고구려 사람들이 기록한 '광개토대왕릉비문'에는 백제가 404년에도 왜국과 함께 고구려에 대항했다고 새겨져 있습니다. 대제국을 이룬 고구려의 최대 경쟁자는 바로 끈질기게 고구려를 공격했던 백제였던 것입니다. 아신왕은 결국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이렇다 할 승리를 거두지 못한 채 405년 죽고 말았습니다.

지금까지 고구려와 백제의 전쟁은 일방적으로 고구려가 승리했다는 사실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었습니다. 하지만 백제의 입장에서 보면 온 힘을 다해 끝까지 고구려에 대항하는 강인한 모습을 보여준 것이지요.


김용만(우리역사문화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