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사연재글

2007년 소년한국일보연재 3 - 역사에 숨겨진 비류왕의 나라.

영양대왕 2007. 3. 18. 21:43
[해양 강국 백제를 찾아서] 역사에 숨겨진 '비류왕의 나라'
인천 문학산 부근 '미추홀'서나라 다스려… 뚜렷한 유물·기록 거의 없어

 인천 문학산에서 본 황해. 비류의 백제는 바다와 함께 발전했다.

 

●백제의 시조는 온조왕과 비류왕

서기 1145년경에 김부식 등이 쓴 ‘삼국사기’는 백제 역사를 알 수 있는 중요한 책입니다. 백제가 멸망한 지 약 500 년이 지나 세상에 나온 이 책에는 백제에 관한 놀라운 내용이 하나 담겨 있습니다.

그것은 백제의 시조가 널리 알려진 대로 온조왕 혼자가 아니라 비류왕도 포함된다는 것입니다. 삼국사기에는 고구려 추모왕(주몽)의 아들인 온조가 고구려에서 나와 백제를 세웠다는 기록과, 백제의 시조가 우태와 소서노의 아들인 비류왕이라는 기록이 함께 실려 있습니다.

비류왕은 두 가지 기록 모두에서 온조왕보다 형이라고 씌어 있습니다. 비류왕이 백제 시조라는 기록을 좀더 살펴볼까요.

비류왕은 어머니 소서노를 모시고 아우 온조와 함께 고구려를 빠져 나와 남쪽으로 패수와 대수 두 강을 건너 미추홀에 살았다고 합니다. 온조왕이 시조라고 하는 기록에 ‘북한산 부아악에 올라 나라를 세우기 위해 한강 유역을 거쳤다.’는 이야기와는 다릅니다. 또 비류왕이 자살을 했다거나, 나라를 잘못 다스렸다는 이야기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비류왕은 자살을 하지 않고 미추홀에서 오래도록 나라를 다스렸다고 볼 수 있습니다. 또 비류가 형이라고 하는 만큼, 처음에는 비류왕이 온조왕보다 더 크고 힘센 나라를 다스렸다고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두 왕족 후손들 번갈아 가며 통치

‘삼국사기’에 기록된 백제 왕실의 계보를 보면 이상한 점이 발견됩니다.

온조왕, 다루왕, 기루왕, 개루왕에 이은 5대 초고왕은 서기 166년에 즉위하여 214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의 동생인 고이왕은 234년에 백제 8대 임금이 되는데, 형제 사이임에도 68 년 뒤에 왕위에 오른다는 것이 매우 어색합니다. 게다가 고이왕은 286년에 죽습니다. 그렇다면 고이왕은 최소한 120 세 이상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니 둘은 친형제라고 볼 수 없습니다.

고이왕의 후손은 9대, 10대, 12대 임금이 됩니다. 5대 초고왕의 후손은 6대 구수왕, 7대 사반왕을 거쳐서 11대 비류왕을 배출합니다. 사반왕이 234년에 죽었는데, 그의 동생인 비류왕이 70 년 후인 304년에 왕위에 올라 40 년이나 나라를 다스렸다는 것입니다. 연도를 따지면 비류왕은 무려 110 세 이상을 살아야 한다는 결론으로, 두 사람 역시 친형제일 수가 없습니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백제에는 비류와 온조 두 사람의 후손에 의해 왕위가 교체되곤 했다는 것입니다. 신라가 박, 석, 김의 세 성씨에 의해 다스려졌던 것처럼 백제도 두 왕족의 후손들에 의해 번갈아 통치됐던 것입니다.

이후 근초고왕이 백제의 왕실 계보를 하나로 통일한 이후부터 오직 온조왕의 후손들만이 왕이 되었습니다.

결국 백제의 왕실 계보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비류왕의 후손들이 비류왕이 죽은 후에 곧 사라진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비류왕의 후손들은 계속 나라를 다스리면서 온조왕의 나라와 함께 연맹 국가를 이루며 존재했거나, 온조왕의 나라와 합쳐진 후에도 왕을 배출할 정도로 힘이 컸다는 것입니다.

온조왕이 처음 나라를 세울 때는 ‘십제’라고 나라 이름을 불렀으나, 비류왕의 백성들을 모두 다 흡수한 뒤에는 ‘백제’라고 바꾸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온조왕의 후손들이 온조만을 백제 전체의 시조라고 내세우면서 비류왕은 차츰 잊혀져 갔던 것입니다.

비류왕이 다스린 나라는 황해를 배경으로 소금 생산과 무역 활동을 통해 재물을 축적했기 때문에 한동안은 농업을 중심으로 발전한 온조왕의 나라보다 더 강했을 것입니다.

수도의 위치는 인천광역시 문학산 부근이었다고 추정하기도 하지만, 뚜렷한 유물이 발견되지 않고 기록도 거의 없어 언제 온조왕의 나라와 합쳐졌는지는 자세히 알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온조왕의 백제만이 아닌, 비류왕의 백제도 있었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김용만 우리역사문화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