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사연재글

2007년 소년한국일보 연재 2회 - 백제건국의 어머니 소서노.

영양대왕 2007. 3. 12. 12:06
[해양 강국 백제를 찾아서] 한국사에 유례 없는 여걸 '소서노'
두나라 건국을 주도하다

●고구려 건국을 돕다

백제는 고구려에서 갈라진 같은 뿌리를 가진 나라입니다. 백제를 건국할 때 가장 큰 역할을 한 사람은 소서노인데, 그녀는 고구려를 건국한 추모왕의 부인이기도 합니다.

서기전 66년에 태어난 소서노는 졸본 부여의 둘째 공주라고도 하고, 졸본 사람 연타발의 딸로 우태와 결혼해 두 아들을 낳고 살다가 과부가 된 사람이라고도 합니다. 그녀는 30 세가 되던 서기전 37년, 부여를 탈출해 압록강 중류 지역인 졸본 부여에 도착한 추모(주몽)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소서노는 자신보다 8 살이 어린 추모의 재능을 알아 보았습니다. 그녀는 자신을 따르던 사람들과 재산을 동원해 추모가 나라를 세우는 일을 도왔습니다. 추모는 마침내 고구려를 건국하게 되고, 소서노는 고구려의 왕비가 되었습니다. 그녀는 고구려 건국에 가장 큰 공을 세웠던 것입니다.

그런데 소서노에게는 비류와 온조라는 아들이 있었습니다. 기록에 따라 두 사람이 첫째 남편인 우태의 자식이라고도 하고, 추모왕의 자식이라고도 합니다. 친아버지가 누구든, 소서노는 비류와 온조 둘 가운데 하나가 다음 고구려의 왕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추모왕이 나라를 다스린 지 19 년이 되던 해인 서기전 18년에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추모왕은 부여에서 탈출하기 전에 이미 예씨와 결혼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때 부여에서 예씨 부인과 그 아들 유리가 고구려로 추모왕을 찾아온 것입니다. 추모왕은 그의 첫째 아들인 유리를 태자로 삼아 장차 고구려의 왕이 되도록 했습니다.

크게 화가 난 소서노는 여기서 큰 결심을 하게 됩니다. 유리가 왕이 되면 자신과 두 아들이 고구려에서 제대로 살 수 없을 것이라고 판단했던 것입니다. 소서노는 자신을 따르던 오간ㆍ마려 등 열 명의 신하를 비롯한 졸본 지역의 많은 백성들을 거느리고 두 아들과 함께 고구려를 떠났습니다. 추모왕도 그녀가 떠나는 것을 막을 수 없었습니다. 고구려 측 기록에는 소서노에 대한 내용이 단 한 줄도 없지만, 백제 측 기록에는 그녀를 알 수 있는 자료들이 남아 있습니다. 고구려에서 소서노는 지우고 싶은 인물이었던 것입니다.

●백제 건국의 어머니

김정호의 동여도에서 본 백제 중심지.

소서노는 두 아들과 함께 남쪽으로 내려와 무리들을 이끌고 한산에 도착했습니다. 그리고 부아악에 올라 살 만한 곳을 살폈습니다. 한산은 오늘날 북한산에서 내려다보이는 서울의 강북 지역이라고 생각되며, 부아악은 북한산의 한 봉우리라고 추정됩니다.

이 때 첫째 아들 비류는 바닷가에서 살기를 원하였고, 온조는 한강을 끼고 있는 곳에 살기를 원했습니다. 결국 비류는 오늘날의 인천으로 여겨지는 미추홀에서, 온조는 지금의 서울 송파구ㆍ강동구ㆍ하남시 일대로 추정되는 하남 위례성에 나라를 세웠습니다. 하지만 형인 비류는 나라를 잘못 다스린 데다 먼저 세상을 떠남으로써 두 나라는 하나의 백제로 통합되게 됩니다.

소서노는 백제가 건국된 지 13 년 만인 서기전 6년에 61 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온조왕은 신하들에게 “우리 주변에는 낙랑과 말갈이 있어 우리를 자주 침범하고, 국모가 돌아가시니 나라가 편안하지 못하다. 이제 수도를 옮겨야겠다.”고 말합니다. 소서노의 죽음은 백제의 뿌리를 흔드는 큰 사건이었던 것입니다. 이는 그녀가 백제 건국에 큰 역할을 했고, 백제인들에게 큰 존경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녀가 죽자 온조왕은 사당을 세우고 어머니인 소서노를 나라의 어머니란 뜻을 지닌 ‘국모’로 받들고 제사를 지냈습니다. 고구려와 백제 두 나라를 세우는 데 결정적인 공을 세운 건국의 어머니였던 것입니다. 소서노는 한국 역사에서 유례가 없는 여걸이었습니다.

고구려 첫 수도인 오녀산성과 비류수 유역. 이 곳에서 소서노가 성장했다.

<김용만 우리역사문화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