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사연재글

소년한국일보 연재 34회 - 해상왕 장보고

영양대왕 2006. 11. 5. 23:18
해상왕 장보고
청해진에 군사 기지 만들어 해적 소탕
동아시아 바다의 풍요 이뤄


당시 장보고가 해상에서 활동하던 모습을 담은 지도.

신라인들이 활발한 활동을 하던 9세기 동아시아 바다에 해적이란 골칫거리가 등장했습니다. 남의 배를 공격하여 재물을 빼앗고, 사람을 잡아다가 노예로 팔기도 했습니다.

그 때문에 많은 신라인들이 피해를 입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을 제압하고 동아시아 바다에 평화와 번영을 가져온 영웅이 있었습니다. 그가 바로 해상왕 장보고입니다.

당나라의 장군되다

장보고는 전남 서남해에서 태어난 사람으로 어릴 때는 궁복이라고 불렸습니다. 말을 타고 창을 쓰는 데 당할 자가 없을 만큼 무예에 뛰어났습니다. 이 후 당나라에 건너가 30세 무렵에 서주 무령군 소장의 자리에 오릅니다. 그는 이 기간 819년 당나라가 제나라를 멸망시킬 때 공을 세우기도 합니다.

제나라는 본래 당나라의 '평로치청절도사'라는 직위를 가진 고구려 유민 이정기와 그 후손들이 산동반도 일대에 세운 나라입니다.

이정기와 그의 후손들은 4 대 60 년에 걸쳐 발해, 신라가 당나라와 교역하는 것을 중간에서 통제하면서 큰 이익을 얻었습니다. 이로 인해 세력이 커져, 한때는 10만 대군과 한반도 면적만큼 큰 영토를 다스리기도 했습니다.

제나라에는 신라인의 거주지인 신라방이 많았습니다. 제나라를 멸망시키는 데 힘을 쓰던 장보고는 신라방의 신라인들이 상업 활동하는 것을 보고 배웠습니다.

장보고를 주인공으로 한 드라마 '해신'의 촬영지.

장보고는 곧 무령군 소장을 그만두고, 당나라와 일본 등지를 돌아다니며 무역을 시작했습니다. 재산을 모으고 군사력도 갖춘 장보고는 귀국하여 흥덕왕을 만납니다.

장보고는 왕에게 당나라 어디를 가도 신라인 노비를 볼 수 있으니, 청해에 군사 기지를 설치하고 해적들이 신라인들을 납치하여 당나라에 파는 일을 못 하게 하겠다고 청을 하였습니다.

하지만 당시 신라는 골품제라는 신분 제도에 따라 사람을 다르게 대접하던 사회였습니다. 신분이 낮은 바닷가 사람인 장보고가 직접 왕을 만났다는 것만으로도 대단히 놀랄 만한 일입니다.

이는 장보고가 이미 신분의 한계를 넘어 크게 성공을 거두었기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흥덕왕은 장보고에게 1만의 군대를 주어 청해 즉 완도에 군사 기지를 설치하도록 했습니다. 장보고는 신라 정부의 허락을 받고 청해진에서 활동을 합니다.

완도에 청자 기술 보급도

장보고가 청해진에 군사 기지를 두고 해적들을 소탕하자, 더 이상 신라인들이 노비로 팔려가는 일이 없어졌습니다. 장보고는 신라 정부도 하지 못한 일을 해 냈던 것입니다.

장보고가 완도 앞에 청해진을 둔 것은 그 곳이 그의 고향 주변이기도 했지만, 완도 주변이 동아시아 항로의 중심이었기 때문입니다. 아울러 완도 부근의 강진에는 좋은 흙이 나와서 도자기를 생산하기에 좋았습니다.

경주역사과학관이 소장하고 있는 신라의 무역선.

우리 나라가 청자를 생산하기 시작한 것은 장보고의 노력이란 주장이 최근 들어 힘을 얻고 있습니다. 장보고는 당나라에서 도자기를 만드는 기술을 들여와 강진에서 청자를 구워 냅니다. 장보고는 청자를 생산해 신라와 일본 등에도 팔았던 것입니다.

그는 또 동아시아 바다의 경찰인 동시에, 엄청난 재산을 모은 거대한 상단의 주인이기도 했습니다. 장보고가 큰 힘을 갖자 신라의 왕족인 김우징은 청해진으로 와서 그의 도움을 받습니다.

김우징은 장보고의 힘을 빌려 신무왕이 되었습니다. 신무왕은 큰 공을 세운 장보고에게 최고의 대우와 상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장보고의 딸을 자신의 아들과 결혼시켰습니다.

그런데 곧 신무왕이 죽고, 그의 아들이 왕위에 올랐습니다. 그러자 장보고의 딸이 왕비가 되어야 하는데, 귀족들은 장보고의 출신이 미천하다고 하여 이 일에 반대했습니다.

장보고가 불만을 갖자, 귀족들은 장보고가 반란을 일으킬 까 봐 몹시 두려워 했습니다. 결국 841년 염장이란 자를 자객으로 보내 몰래 그를 죽였습니다.

장보고는 비록 사라졌지만, 해적을 몰아 내고 만든 안전한 동아시아 바다는 신라ㆍ당ㆍ일본ㆍ아라비아 사람들이 서로 왕래하면서 함께 번영을 누리는 풍요의 바다로 남았습니다.


<김용만 우리역사문화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