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사연재글

2006년 소년한국일보 연재 32회 - 이슬람국가와 교류한 신라.

영양대왕 2006. 10. 22. 16:37
이슬람 국가와도 활발히 교류
개방적이고 풍요로웠던 시대

경주 동남쪽에 위치한 괘릉에는 무덤을 지키는 돌로 만든 사람들이 서 있습니다. 그들 가운데 문관 옷을 입은 사람은 중앙 아시아의 위구르인입니다. 또 무인 모습을 한 사람은 페르시아 군인입니다.

이 능은 아직 누구의 것인지 밝혀지지 않았지만 신라왕의 무덤이라는 의견이 많습니다. 만약 괘릉을 신라왕의 무덤이라고 본다면, 이들 외국인은 신라의 관리와 군인이라고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신라 유물에서 발견된 이슬람인의 모습

경주 용강동에서 출토된 문관의 모습을 한 토용. 8세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높이는 17 cm이며 외국인의 모습을 하고 있다.

신라인들이 만든 흙 인형인 토우에도 한눈에 외국인임을 알 수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이는데, 이들은 대개 이슬람 교를 믿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불교의 나라 신라에 이슬람 교를 믿는 사람들이 찾아온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슬람 교는 7세기 초 마호메드가 유일신 알라의 계시를 받고 아라비아 반도 메카에서 창시한 종교입니다. 이슬람 교는 북아프리카와 중앙 아시아의 대부분 지역, 그리고 인도네시아 등에서 믿는 세계 3 대 종교의 하나입니다.

서기 651년 최초로 이슬람 제국에서 당나라에 아랍인 특사를 파견한 것을 계기로 중국에 전파된 이슬람 교는 서부와 광주 등에 널리 퍼졌습니다.

이슬람 신자들은 특히 늘 진리 탐구를 위해 노력을 했고, 이슬람 세계 또한 오랜 세월 세계 지식 문명의 중심에 있었습니다. 유럽 문명의 원천도 사실은 이슬람 세계가 축적해 놓은 과학 지식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당시 세계 최고의 선진 문명을 가졌던 이슬람 세계의 사람들은 '신밧드의 모험' 이야기의 주인공처럼, 바다를 누비며 먼 곳도 마다하지 않고 외국과 활발한 무역을 했습니다.

특히 이슬람 사람들은 당나라에 와서 대규모 이슬람 공동체인 '번방'을 광주ㆍ천주ㆍ복주ㆍ항주ㆍ양주 등 5 대 도시에 세웠습니다. 그 가운데 양주는 신라인의 대규모 공동체인 '신라방'과 인접하고 있었기에 그 곳에서 신라인과 이슬람 사람들이 만나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자연히 두 세력이 만나 많은 물자를 교역하게 되었고, 이슬람인들도 신라에 드나들게 된 것입니다. 페르시아 만에서 출발한 이슬람 상인들의 배는 대략 100 일이면 신라에 도착했습니다.

현재까지 알려진 자료만으로 신라인이 페르시아 만 지역까지 갔는지는 확인할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혜초 스님이 페르시아를 방문한 적이 있었던 만큼 신라인들도 무슬림의 나라를 방문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무슬림들, 상거래뿐 아니라 벼슬도 올라

경주 괘릉에 있는 무인상. 페르시아인(지금의 이란)의 모습이다.

846년에 지리학자 이븐 쿠르다드비가 쓴 아랍 지리서 '왕국과 도로총람'에는 이슬람 사람들이 신라에 직접 왔다고 적혀 있습니다. 이 책에는 신라가 금이 많은 나라이며 자연 환경이 쾌적해서, 이 곳으로 진출한 이슬람 사람들이 영원히 정착하여 떠날 줄을 모른다고 씌어 있습니다.

당시 신라는 이슬람 상인들로부터 상아ㆍ향수ㆍ향료ㆍ페르시아 융단 등을 사들이고, 황금ㆍ거울ㆍ향로ㆍ도자기 등을 팔았습니다.

이처럼 신라는 이들과의 교역을 통해 경제적 풍요를 누릴 수 있었습니다.

한편, '삼국유사'에 등장하는 처용은 바다를 건너 아라비아에서 온 이슬람 사람이라는 주장이 있습니다. 처용은 신라에서 9위의 관등인 급찬을 하사받고 나랏일을 하게 됩니다. 즉 신라에 온 이슬람 사람들은 단지 상거래만 한 것이 아니라, 벼슬까지 오르며 오랫동안 살았던 것입니다.

그들이 신라를 방문한 것은 거래할 물건이 많은 풍요로운 나라이면서도 외국인들이 와서 살기 편한 개방적인 곳이었기 때문입니다. 이같이 신라는 열린 세계를 지향하며 먼 외국과도 활발한 교역을 하며 번영을 누렸습니다.


<김용만 우리역사문화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