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사연재글

2006년 소년한국일보연재 36 - 최치원과 골품제

영양대왕 2006. 11. 19. 20:52
최지원, 당도 놀란 최고의 문장가
엄격한 골품제에 막혀 제 뜻을 펴지 못하다

당의 과거 시험 합격', 토황소격문' 유명

최치원은 신라 말 최고의 문장가로 불렸습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공부하기를 좋아했으며, 12 세에 당나라로 유학을 떠나 17 세의 나이로 그 곳에서 과거 시험에 합격했습니다.

고운 최치원 영정.

당나라의 관리가 된 최치원은 얼마 뒤, 황소 장군의 반란을 무찌르기 위한 군대의 종사관이 되었습니다. 이 때 최치원은 군대 문서를 정리하고 황소의 군대에게 보내는 글을 지었습니다.

이 가운데 '토황소격문'은 황소가 읽다가 놀라 자리에서 떨어졌다는 이야기가 전해질 만큼 뛰어난 것으로 유명합니다. 최치원은 이처럼 훌륭한 문장가로 이름을 떨치고 벼슬도 높아졌으나, 신라로 돌아가기를 원하여 28 세가 되던 885년 귀국했습니다.

당나라에서 이름을 날린 덕분에 최치원은 신라에서도 벼슬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는 고국에서 자신의 뜻을 펼치기를 꿈꾸었으나 신라는 이미 멸망의 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최치원은 894년, 신라의 진성 여왕에게 급히 해결해야 할 정책 10 가지를 건의했습니다. 그러자 진성 여왕은 이를 받아들이고, 그를 아찬으로 임명했습니다.

아찬은 신라 관등 가운데 6위에 해당합니다. 이것은 지방의 장관은 될 수 있지만 정부 중요 부서의 책임자는 될 수 없는 등급이었습니다. 최치원은 아무리 노력해도 그 이상의 높은 관등과 관직을 가질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 하면 신라는 태어날 때 부모의 사회적 지위에 따라 부여되는 신분 즉 골품에 의해, 올라갈 수 있는 관직의 등급은 물론 자신이 살 집과 사용할 물건의 종류까지 정해진 나라였기 때문입니다.

골품의 한계 느끼고 하야

고려와 조선도 타고날 때의 신분에 따라 모든 것이 차별되는 사회였습니다. 하지만 신라는 그보다 더욱 엄격한 골품제에 의해 모든 것이 결정되었습니다.

보령시에 있는 성주사. 사진 가운데에 최치원이 남긴 낭혜화상의 비가 있다.

골품 가운데 최고 신분은 성골로, 부모가 모두 왕족인 사람들을 뜻하며 진덕 여왕을 끝으로 사라졌습니다. 그 다음이 진골인데, 왕과 친척 관계에 있는 사람들로 5 등급 이상의 관직을 얻을 수가 있었습니다.

그보다 아래로 6두품ㆍ5두품ㆍ4두품이 있고, 3두품 이하는 일반 평민과 노비였습니다. 6두품은 신라의 17 개 관등 가운데 6위까지, 5두품은 10위, 4두품은 12위 관등까지 오를 수가 있었습니다.

최치원은 6두품이었기 때문에 6위인 아찬 이상의 벼슬을 할 수 없었고, 따라서 새로운 정치를 할 힘이 부족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결국 정치에 실망하여 벼슬을 버리고 각지로 유람하다가, 가야산 해인사에 들어가 남은 생애를 마쳤습니다.

최치원은 비록 벼슬로 자신의 뜻을 펼치지는 못했으나 신라 화랑도를 잘 설명한 '난랑비서문'을 비롯해 '계원필경' 등 많은 글을 남겼습니다. 또 '낭혜화상'ㆍ'진감선사' 등 스님들의 비석에 글자를 적기도 했습니다.

골품의 한계로 뛰어난 인재를 등용하지 않은 신라는 점차 몰락을 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최치원은 신라를 구할 힘이 없었지만, 그가 살던 시대 한쪽에서는 골품제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나라를 세우고자 하는 움직임이 생기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곧 후고구려와 후백제를 세운 궁예와 견훤입니다.


<김용만 우리역사문화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