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사연재글

2005년 소년한국일보연재 35회 - 신라 귀족의 내분

영양대왕 2006. 11. 12. 22:32
나태한 귀족들의 권력 싸움 '멸망의 전주곡'


성덕 대왕 신종 : 771년 혜공왕 때에 만들어진 우리 나라 최대의 종. 에밀레종이라고도 한다.

삼국을 통일한 신라는 오랫동안 평화와 번영을 누렸습니다. 당ㆍ발해ㆍ일본 등 주변국들은 신라에게 큰 위협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신라의 귀족들은 점차 나태해지기 시작했습니다.

765년, 8 살의 어린 나이에 왕이 된 혜공왕은 나이가 들어서도 정치를 잘 하지 못하고 놀기를 좋아했습니다. 임금이 임금 노릇을 제대로 못 하자, 신하들이 반란을 일으키기 시작했습니다. 그가 임금으로 있었던 16 년 동안 무려 5 차례에 걸쳐 귀족들이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결국 마지막 반란군이 혜공왕의 목숨을 앗아 가고 말았습니다.

혜공왕의 뒤를 이어 반란군을 제압하고 왕위에 오른 선덕왕은 불과 6 년 만에 병을 얻어 죽었습니다. 선덕왕에게는 아들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신하들은 다음 왕으로 선덕왕과 가장 가까운 친척인 김주원을 모시려고 했습니다.

●귀족들의 반란

김주원의 집은 경주의 북천 북쪽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마침 큰 비가 와서 북천의 물이 크게 불어 김주원이 궁으로 올 수 없게 됐습니다.

그러자 한 귀족이 ‘큰 비가 오는 것은 하늘에서 김주원을 왕으로 삼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라 말하고, 상대등인 김경신을 왕으로 추천하였습니다. 결국 귀족들의 회의에서 만장일치로 김경신을 왕으로 모시게 되었습니다. 그가 곧 원성왕입니다. 이후 신라의 김씨 성을 가진 왕들은 모두 원성왕의 자손입니다.

원성왕은 왕이 되지 못한 김주원을 ‘명주군왕’으로 삼아 강릉 지역을 지배하도록 했습니다. 그런데 자신의 아버지가 왕이 되지 못한 것을 억울하게 여긴 김주원의 아들이자 웅천주 도독인 김헌창은 822년에 ‘진짜 왕은 자신이 되어야 한다.’면서 공주 지역에서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김헌창의 반란은 그 규모가 대단히 커서 신라 9 개 주 가운데 절반이 김헌창을 지지할 정도였습니다. 결국 신라 정부는 원정군을 파견하여 간신히 진압할 수 있었습니다.

김헌창의 아들 김범문도 아버지의 뒤를 이어 지금의 서울인 한산에서 반란을 일으켰다가 실패하는 등 신라의 혼란은 커져 갔습니다.

●150 년 동안 무려 20 명의 왕 교체

몇 십 년 전까지만 해도 경주 북천은 큰 비가 내리면 자주 물이 넘쳤다. 북천이 넘치는 바람에 김주원은 왕이 되지 못했다.

혜공왕 시대의 혼란을 시작으로 신라는 150 년 동안 무려 20 명의 왕이 바뀌고, 많은 왕들이 반란으로 인해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민애왕처럼 1 년도 못 되어 왕위에서 쫓겨난 임금들도 생겼습니다. 민애왕을 몰아 낸 사람이 바로 장보고의 지지를 받아 왕위에 오른 신무왕이었습니다. 장보고와 같은 지방의 유력자들도 왕위 계승에 간여할 정도로 정치적 혼란은 신라 전 국토에 미쳤습니다.

이 과정에서 권력을 빼앗긴 귀족들은 차츰 지방으로 내려가 그 곳에서 힘 있는 지방 세력으로 성장하였습니다. 이들을 통제해야 할 중앙 정부의 힘이 약해지자, 지방의 세력가들은 자신의 힘을 키우기 위해 토지를 빼앗고, 소작료를 비싸게 받거나, 고리대금업을 하는 등 농민들을 괴롭혔습니다.

이로 인해 토지를 잃고 떠도는 사람들이 생겨났고, 나라는 세금 수입이 줄어들어 큰 일을 할 자금이 부족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중앙 정부는 군대를 유지하기 힘들었고, 결국 지방 세력가들을 통제할 힘을 잃게 되는 악순환이 반복되었습니다.

정치적 혼란으로 신라는 아주 빠르게 쇠약해지고 있었습니다. 특히 신라의 세 번째 여왕인 진성여왕이 다스리던 시기(887년~897년)에는 나라가 크게 어지러웠습니다.

왕실과 귀족들은 사치를 즐기면서 부족한 세금을 거두기 위해 각지에 사자를 보내 농민들에게 세금을 내라고 재촉했습니다. 그러자 농민들도 참을 수가 없어 전국 각지에서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오랜 번영을 누리던 신라도 이렇게 내부에서 분열과 갈등이 생기면서 결국 멸망의 길로 들어서게 된 것입니다.

<김용만 우리역사문학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