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의발견-나의생각

인사가 만사인데 - 고국천왕과 안유, 을파소를 기억하며.

영양대왕 2006. 1. 23. 12:05
인사가 만사인데 - 고국천왕과 안유, 을파소를 기억하며.
번호 : 31   글쓴이 : 김용만
조회 : 200   스크랩 : 0   날짜 : 2004.03.03 11:13
2002년 3월 18일에 쓴 글로, 통일과 미래를 논한다 방에 12번으로 썼던 글이다.
문득 생각이 나서 여기에 옮겨 놓는다.

** 고국천왕과 안유, 을파소를 기억할 것이다.

을파소는 서기 191년부터 13년간 고구려 9대 고국천왕과 산상왕을 모시며 진대법을 실시한 고구려 제일의 국상이다. 그런데, 을파소는 국상에 임명되기 전까지는 한낮 농부에 지나지 않았다. 어떻게 그가 하루아침에 오늘날 수상직과 같은 국상직에 임명될 수 있었을까?

국가 체계가 확고하고 귀족들이 득실거리는 고구려에서 이와 같은 파격적 인사는 놀랄만한 일이다. 재야 인사나 이름없는 사람을 크게 중용하는 사례를 흔히 유비가 제갈량에게 했던 삼고초려에서 예를 찾곤한다. 하지만, 고국천왕이 을파소를 등용한 사건은 그 보다 16년이나 빠르다. 오히려 고구려의 성공사례가 유비로 하여금 제갈량을 등용하도록 결심하게 한 자극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고국천왕은 왕이 된 지 13년 되던 해에 정치를 바로 잡고자 새로운 인재를 추천하라고 지시를 내렸다. 이때 많은 사람들이 추천한 인물은 을파소가 아니라, 안유였다. 하지만, 안유는 자신에게 쉽게 높은 관직을 맡아 정치를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음에도, 자신보다 더 능력이 있는 을파소를 대신 천거했다.

고국천왕은 오직 안유의 말을 믿고 을파소에게 사람을 보냈다. 그리고 한낮 농부였던 을파소에게 중외대부라는 높은 관직을 주었다. 그러나, 을파소는 진정 정치를 바로잡자면 중외대부라는 직책으로는 불가함을 알고 스스로 물러나려고 했다. 이때 고국천왕은 을파소의 뜻을 헤아리고, 그를 국상에 임명했다. 을파소에 대한 많은 비난이 이어졌지만, 왕은 흔들리지 않았다.

국왕의 절대적 지원속에 을파소는 교육제도의 개편, 부정부패 방지, 인재 선발 활성화, 진대법을 비롯한 경제정책 개혁 등을 통해 정치를 바로잡아 고구려를 부강하게 만들었다.

1800년이 지난 오늘 고국천왕과 안유, 을파소를 생각해본다. 을파소와 같은 훌륭한 인재가 지금 한국에 수없이 존재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그와 같은 업적을 이룰 수 있을까? 고국천왕과 같이 인재를 널리 구하고, 한번 구한 인재를 끝까지 밀어준 윗 사람들이 없다면, 또 안유와 같이 자신보다 뛰어난 사람에게 기회를 양보하는 사람들이 없었다면, 국상 을파소는 존재할 수 없다.

인사(人事)는 만사라 한다. 그런데, 우리사회는 일할 풍토, 인재 선발 등에 있어서 연공서열, 집단 이기주의, 지역주의 등의 풍토가 인사를 그릇치게 만들고 있다. 서로들 능력있는 사람을 견제하고 그저 편안하게 자기 밥그릇을 지키는데만 급급한다면, 그 사회와 조직의 발전은 기대할 수 없다. 한 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조직의 생산성은 상위 10%인재가 90%를 좌우한다고 한다. 그렇다면 뛰어난 인재가 능력을 발휘하게 하는 기회를 만들어주는 것은 나머지 90%사람들에게도 도움이 되는 것이다.

윗 사람들은 일을 맡기면 재량권을 주고 믿어주며, 동료들은 보다 능력 있는 사람들을 추천해주며, 일을 맡은 자는 성심껏 자신의 능력을 십분 발휘할 수 있는 풍토가 정착되어야 하겠다. 고국천왕과 안유, 을파소와 같은 사람들이 많이 많이 나올 수 있다면 우리 사회는 보다 발전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사회의 병폐인 연고주의, 파벌주의를 타파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대국이 되는 꿈을 포기한 체 분열되고 나약한 나라에서 불만을 품을 체 살아갈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우리의 미래는 곧 사람에 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