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의발견-나의생각

고구려와 백제의 관계 1 - 양국민의 왕래, 광개토대왕이 백제인을 수묘인으로 쓴 이유

영양대왕 2006. 1. 22. 21:49
고구려와 백제의 관계 1 - 양국민의 왕래, 광개토대왕이 백제인을 수묘인으로 쓴 이유
번호 : 7   글쓴이 : 김용만
조회 : 471   스크랩 : 0   날짜 : 2002.03.11 13:44
고구려와 백제의 관계

백제는 고구려와 함께 부여에서 출발한 나라다. 백제의 건국 시조인 온조와 비류는 추모왕의 아들이며, 국모(國母)인 소서노는 추모왕의 둘째 부인이다. 백제에서는 동명왕묘(東明王廟-추모왕의 사당)을 만들어 놓고 수시로 제사를 지내기도 했다. 광개토대왕에게 공격을 받아 나라가 위기에 몰렸을 때 백제 아신왕은 동명왕묘에서 제사를 지내기도 한다.

두 나라는 분명 같은 뿌리에서 나왔지만, 경쟁의식도 있었다. 두 나라 사이에는 낙랑과 대방과 같은 세력이 있어서 건국초기에는 직접적 만남이 드물었으나, 4세기 중반이후로 직접 국경을 맞대면서 잦은 전쟁을 치루기도 하면서 문화적 교류도 많았다. 특히 7세기에 당나라라는 외세에 맞설 때는 견고하지는 않았지만, 동맹관계를 맺기도 했다. 하지만, 백제 근초고왕과 싸운 고국원왕의 죽음, 광개토대왕과 장수왕의 거듭된 백제 공격, 그리고 중국세력과 동맹을 맺으려는 백제를 여러 차례 견제한 고구려의 행동에서 보듯 두 나라간에는 긴장관계가 더 많은 듯 보인다. 하지만, 양국 간에는 서로 이질적 요소보다는 같은 문화 요소가 많았기 때문으며 양국간에도 빈번한 사람들의 왕래가 있었다.

아래의 표는 『삼국사기』에 기록된 백제인이 고구려로 온 사건들을 정리한 것이다.

구 분, 연 대, 사 건, 내 용 , 고구려로 온 이유
대무신왕 2년, 온조왕 37년 19, 백제 민호 1천여명 투항해옴, 한강 동북지역의 대기근
문자명왕 8년, 동성왕 21년 498(499) 한산지역 2천여명 투항해옴, 가뭄과 도적의 피해 극심
근초고왕 26년 371 고구려로 도망갔던 사기(斯紀)가 백제로 돌아가 고구려 군사 정보를 알려줌, 나라에서 쓰는 발밥굽을 상하여 죄를 얻을까 두려워서
광개토대왕 4년(5년) 395 패수에서 싸워 적 8천명을 포로로 잡음, 전쟁 포로
광개토대왕 6년(비문) 396 백제가 1천명을 고구려에게 바침, 백제의 항복 표시
개로왕 21년 475 고구려의 선봉장 걸루(桀婁), 만년(萬年)은 본시 백제인임. 개로왕을 욕보임, 죄를 지어 고구려로 도망감
장수왕 63년 475 백제왕을 죽이고 포로를 8천명 잡아옴, 전쟁 포로
장수왕 66년, 삼근왕 2년 478 백제 은솔 연신(燕信)이 반란에 실패하자 고구려로 감, 좌평 해구와 반란, 실패하자 부인을 버리고 도망감
개로왕 시기 455~475 도미(都彌)의 처가 남편과 함께 옴, 개로왕의 만행을 피해옴
문자명왕 11년 501 가불, 원산 2개성 공격, 남녀 1천명 포로로 잡아옴 , 전쟁 포로
보장왕 18년 석두성 공격, 3천명 포로로 잡아옴, 전쟁 포로
의자왕 20년 660 왕자 부여풍(扶餘豊)이 고구려로 도망, 백제 부흥군의 실패
의자왕 20년 660 부흥군 지도자 지수신(遲受信)이 처자를 버리고 고구려로 도망감, 임존성에서 당(唐)에게 패함

위 사례는 실제 상황에 비해 비교적 적게 전해지는 사례임에 분명하다. 전쟁 포로가 기재되지 않은 숱한 전쟁에서 서로의 백성이나 군인들을 포로로 잡았을 것이고, 누락된 대규모의 이주도 있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위 사례만으로도 당시 고구려와 백제간에 많은 왕래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백제 사람들이 자발적인 이유로도 쉽게 고구려로 넘어 올 수 있었음은 국경이 폐쇄적이지 않았던 당시 상황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하겠다. 양국 백성들간에는 국가나 종족에 대한 관념이 투철하지 않았것도 한 이유가 될 것이다. 백성들을 먹고 살기 위해 자발적으로 국경을 넘은 것은 당시 사회에서는 흔한 일이었다.

양국간의 인물의 왕래의 대다수의 사례는 전쟁이다. 전쟁의 목적에 재물과 사람의 약탈에 있었던 만큼 양국간의 빈번한 전쟁은 양국간의 서로 많은 포로를 만들어 냈다. 고구려만이 백제인을 잡아온 것은 아니다. 백제도 근초고왕 24년(369)에 고구려를 공격하여 5천여명의 포로로 잡아갔고, 진사왕 6년(390)에는 고구려 도곤성을 공격 남녀 200인을 빼았기도 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는 고구려에 백제인이 훨씬 많이 잡혀오거나 자발적으로 귀순해왔다. 백제 근초고왕은 잡아온 포로들을 장군과 병사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광개토대왕의 백제 공격으로 인해 한강 이북의 땅을 차지한 고구려는 475년 장수왕의 백제 한성 공격 이후로는 오늘날의 서산, 온양, 천안, 공주인근까지 고구려의 영토가 되기도 한다. 물론 한강 이남의 땅의 지배는 불과 몇십년에 지나지 않았지만, 경기도 전역과 충청도 일부까지 고구려의 영토가 되었던 점은 주목해야 할 점이다. 이 곳은 초기 백제의 중심지였다. 이곳의 문화가 고구려에 흡수되었다. 즉 고구려 문명에 백제인이 다수 참여했고, 백제의 문화도 고구려의 문명을 확대시키는데 일정한 역할을 했다는 점이다. 하지만, 당시 국력이 앞서고 전체적인 문명의 힘이 강한 고구려가 백제에게 문화적 영향을 준 것이 더 많았다.

필자가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양국간의 문화적 일체감의 문제다.
『광개토대왕비문』에는 수묘인(守墓人)에 대한 광개토대왕의 다음과 같은 명령이 있다.
“내가 죽은 뒤 나의 무덤을 편안히 수묘(守墓)하는 일에는, 내가 몸서 다니며 빼앗아 온 신래한․예(新來韓․穢) 들을 데려다가 무덤을 수호․소제하게 하라“
광개토대왕이 자신의 무덤을 지키는 일을 본래 고구려인이 아닌 포로로 잡아온 사람들을 시켰던 일은 당시 고구려인의 종족관념, 문화관념 문제와 관련하여 매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비문』에는 광개토대왕의 명에 따라 36곳에서 차출된 신래한예 220가구로 하여금 묘를 지키게 하였는데, 그들이 묘를 지키는 예법을 모를까봐 염려되어 다시 원 고구려인(舊民) 110가구를 더 데리고 와서 330가구로 수묘인을 삼았다는 내용이 있다.
광개토대왕은 신래한예로 하여금 전적으로 자신의 무덤의 관리를 맡기려고 했었다. 무덤의 관리 즉 수묘인의 일은 단순히 무덤을 청소하고, 묘역을 정리하는 것은 아니다. 『비문』의 내용은 광개토대왕릉 하나의 무덤에 330가구가 수묘를 하게 되어있다. 그리고 광개토대왕릉의 수묘인들은 30가구의 국연(國烟)과 300가구의 간연(看烟)이 있는데, 국연은 최소한 무덤에서 행했을 제사의 의식을 직접 준비하는 사람들이었다. 국연은 원 고구려인만이 아니라, 신래한예에서도 20가구가 있다. 이들은 광개토대왕이 왕위에 있었을 때에 데려온 사람들이지만, 원 고구려인과 똑 같은 일을 맡았던 것이다. 그렇다면, 고구려인의 종교적 관념을 충분히 알고, 고구려인의 무덤에서의 행사에 대해서 그 진행과정까지 충분히 알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그렇다면 여기서 한(韓)과 예(穢)는 도대체 누구를 지칭하는 것인가. 한과 예는 국가명칭이 아니라, 종족 명칭이다. 『비문』에 등장하는 36곳의 수묘인의 출신지 중 최대 26곳은 고구려가 백제를 공격할 때 빼앗은 성(城)의 이름으로 볼 수가 있다. 그렇다면 수묘인의 대다수는 백제인이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나머지 10개성도 백제지역이었을 확률이 높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제인 혹은 백제를 멸시하는 이름인 백잔(百殘) 사람이라고 하지 않은 것은 한과 예가 국명이 아닌 종족명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신라나 가야, 동예인도 한과 예에 속할 수 있다. 하지만, 신라의 경우는 당시 고구려에 완전한 속국이었고, 자발적인 동맹국이었기 때문에 우호적인 국가의 사람들을 데려다가 수묘인을 맞기는 것은 양국 외교관계에 있어 바람직하지 않았을 것이다.

신라나 가야, 동예의 사람보다는 마한 사람이 수묘인에 포함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영락 6년 백제가 고구려에 항복을 할 때 백제는 1000명 남녀를 항복의 예물로 바친다. 이들은 당시 백제가 완전히 복속시키지 못했다고 여겨지는 마한사람일 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꼭 백제가 아닌 한과 예라는 보다 폭넓은 용어를 사용한 것은 아닐까한다. 지명이 불확실한 10개성의 위치가 밝혀진다면 보다 수묘인의 구성을 정확히 알 수 있겠지만, 우선은 한과 예가 한반도 남부지역의 사람들인 것만은 분명하다고 하겠다.

그런데 당시 고구려는 주변의 거란, 숙신, 왜, 북연을 비롯한 이민족들을 통치했었고, 많은 수의 포로들을 데리고 왔다. 또한 동부여 사람들도 데리고 왔다. 그런데 동부여의 경우는 영락 20년에 왕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가서 옛부터 조공을 바치는 두나라간의 상하관계를 확인하고 온 바 있다. 이때 동부여 사람들이 다수 광개토대왕을 따라 고구려로 왔다. 하지만, 광개토대왕이 재위 23년만에 죽었으므로, 데려온 지 몇해 안되는 동부여 사람을 수묘인으로 삼았을 가능성은 적다. 또한 이들은 한 또는 예라고 부른 사람들이 아니었다. 동부여를 제외한 나라들은 광개토대왕이 영락 10년 이전에 이미 정벌하기 시작한 나라들이다. 그런데 왜 이들로 부터는 수묘인을 차출하지 않았을까.

그것은 주변의 거란, 북연, 왜 등의 이민족들과 고구려 사람들간에 전체 생활상이 크게 차이가 났기 때문일 것이다. 다시 말해 무덤에 제사를 지내고, 무덤을 관리하는 것은 가장 고구려적인 종교의례였다. 이러한 의례를 전혀 문화적 기반이 다른 사람들에게 맞길 수는 없는 노릇이다. 즉, 고구려와 유목국가, 중국, 왜와는 문화적 차이가 비교적 컸던데 비해, 같은 농업적 생산기반을 가진 한반도 남부의 한반도 남부의 백제와 마한, 신라 등은 크게 다르지 않은 삶의 양식을 살았기 때문일 것이다.

후연의 경우도 농업 기반이 강한 나라였지만, 이들을 기용하지 않은 것은 우선 언어가 틀리고, 종교적 전통이 다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광개토대왕 자신이 데려온 사람들에게 고구려의 전통예법을 서슴없이 맞기려 했던 것은 한과 예의 풍습이 고구려의 것과 크게 차이나지 않는다고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장수왕이 예법을 모를까봐 염려한 것은 고구려와의 약간의 절차상의 차이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렇지만, 그 차이는 심각한 차이는 아니었던 셈이다.

백제는 고구려와 마찬가지로 시조신을 숭배하는 나라로 매년 4번 수도에 있는 시조신의 사당에서 제사를 지냈다. 고구려가 동맹행사를 통해 하늘에 제사했듯이, 백제도 매년 4번 왕이 하늘과 5방위의 신(五帝神)에게 제사를 지냈다. 또한 고구려에서 유화부인을 나라의 어머니로서 부여신으로 숭배하였듯이, 백제도 소서노를 국모(國母)로서 모시고 제사를 지냈다. 가장 기본적인 신앙이 고구려와 다를 바가 없었다. 때문에 백제인을 고구려에서 수묘인으로 가장 많이 사용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