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의발견-나의생각

고구려는 조선과 무엇이 달랐을까? - 공간에 대해서 1-1

영양대왕 2006. 1. 22. 21:42
고구려는 조선과 무엇이 달랐을까? - 공간에 대해서 1 -1
번호 : 4   글쓴이 : 김용만
조회 : 453   스크랩 : 0   날짜 : 2002.03.01 16:06
고구려를 알기 위해서는 고구려 사람들이 살았던 환경과 그들의 생업에 대해서 이해하여야 할 것이다. 고구려인들의 생활무대는 한반도 만이 아니다. 고구려는 705년 이상의 긴 역사기간 동안 영토의 변화도 많았고, 시대별로 생산기반의 변화도 많았다.

중국사의 경우 양자강 남쪽지역에 대한 개발 문제를 비롯해서 시대별로 인구와 생산량의 증감 등에 대한 다양한 연구 결과들이 있지만, 우리는 고구려 연구자가 부족한 탓도 있지만, 무엇보다 역사를 지나치게 한반도 내의 역사로만 보고자 하는 일본의 식민사학의 영향과 조선사 위주, 신라사 위주의 연구로 인해 시대별 다양성에 대한 연구는 거의 알지 못하고 있다. 때문에 고구려에 대한 이해가 막연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다행히 최근 들어 만주 지역에 대한 자연환경 조사, 현지 답사 등을 통해 고구려가 살았던 지역에 대한 이해가 진전되고 있는 상황이므로, 앞으로는 고구려의 인구분포와 생업 활동에 대한 이해도 심화될 것이다.
필자는 98년 출간한 "고구려의 발견"에서 고구려 영토를 크게 16개 지역으로 나누어 고구려의 활동무대에 대한 초보적인 이해를 시도한 바 있다. 이제 이것을 한 차원 발전시켜 영역별 특성과 시대별 인구 분포와 산업의 발전이란 측면, 그리고 문화의 변화 측면까지 진일보시켜 이해하려고 한다.
고구려는 어떤 나라인가라는 문제에 대해 좀 더 진전된 이해를 해보려고 한다.

고립된 자연환경과 일정한 물질의 획득, 외부의 자극이 없는 곳에 사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삶의 형태를 쉽게 바꾸지 못한다. 이런 지역에 사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생활양태를 지속적으로 지켜 전하기 때문에 수 만년이 지나도 변화의 모습이 없다. 우리는 이런 사람들을 시베리아 툰트라 지대, 아프리카 밀림지대, 남태평양과 오세아니아주의 여러 섬들, 아마존 밀림 지대에 사는 사람들의 생활을 통해 익히 보아왔다.

반면 다른 곳에 비해 일찍 문명이 싹튼 지역은 자연환경이 주위로부터 개방되어 있고, 인간의 인위적 노력에 의해 풍족한 산물을 얻을 수 있는 반면, 인간이 노력하지 않으면 곧 굶어죽을 수도 있을 만큼 자연환경이 때로는 은혜로우면서도 때로는 혹독한 곳들이다. 동아시아에서 문명이 싹트기에 충분한 조건을 가진 지역은 무엇보다 황하 유역의 충적 평양지대다. 이곳에서 일찍이 문명이 꽃피웠으니 이름하여 황하문명이라고 한다.

그런데, 우리는 최근 황하문명에 대해 몇가지 의문을 품게 되었다. 동아시아 문명이 황하일대에서 비롯되어 그 문명의 주변의 나라에게 일방적으로 영향을 주었다는 기존의 시각이 무엇인가 잘못되었음을 인식하게 되었다. 이런 인식의 발달은 무엇보다 고고학의 발굴성과 때문이다.

지금부터 6500년전의 황하 일대의 앙소문화 보다 훨씬 빠른 시기에 요서 지역에서 문화가 발전했기 때문이다. 크게 홍산문화라 일컫는 요서 지역의 문화는 대략 5천년전의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사해문화가 지금부터 7천년전, 흥륭화 문화가 지금부터 약 8천년전으로 올라간다. 또한 요하 동쪽에 위치한 심양시 신락유적은 지금부터 7200년 전의 것이다. 문화 내용 또한 홍산문화는 옥기 문화의 전형을 보여준다.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5천년전의 홍산문화에서 돌로 된 성의 흔적과 제사터, 신전 무덤이 함께 나왔다는 점이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요하 유역이 동아시아에서 가장 오래된 문명 지대였다는 것이다. 그것은 지역이 개방된 지역, 문명이 꽃필 수 있었던 지역이었음을 말해준다. 요하 이동의 만주지역도 고대로부터 문명이 발전했던 곳이다. 북한에서 주장하는 대동강 문명권의 실제 여부는 지금 논외라고 치더라도, 옛부터 요하 유역에서 한강에 이르는 지역에는 고조선이 번영하고 있었다. 부여도 마찬가지였다. 부여도 수준높은 문화를 가진 나라였다. 고구려는 부여와 고조선 두 문화를 함께 전승 받았던 나라다. 그리고 문명이 꽃피울 수 있는 개방된 지역에서 살았다.
요서, 요동 지역이 결코 신석기와 청동기 시대에만 문명이 꽃피우고 말았던 것이 아니다. 동아시아 모든 문화가 중원에서 비롯되어 그곳으로 부터 배워왔다는 것은 대단히 커다란 착각이며, 각 지역은 그 나름의 문화를 꽃피우며 살아왔다.

무엇보다 먼저 구분해야 할 것이 북방 유목문화다. 청동검을 비롯해서 수레의 발달, 암각화의 작성 등은 모두 유목민들이 건설한 북방 유목문화가 중원의 농경문화보다 빨랐다. 중국문명의 초기를 장식한 은나라 역시 처음에는 유목민들이었다. 이들이 농경민으로 변신해가면서 중원문화의 발전 속도가 빨라졌다고는 할 수도 있다. 유목민들이야말로 문화 창조의 원동력이다.

이들은 이동성을 바탕으로 물자를 교류하면서 생활하고 이곳과 저곳의 문화를 섞어서 새로운 문화를 창조해내는 사람들이다. 정착 농경민들이 유목민과 만나지 못한다면 정착 농경민의 문화는 정체되고 만다.
중국이 문화를 크게 발전시켰던 한, 당, 원 시대를 보면 대외 교역이 활발했고, 열린 사회를 지향했었다. 때문에 다채로운 문화가 들어와서 새로운 문화로 변이되었던 것이다. 남북조 시대의 남조와 같이 폐쇄된 사회에서는 문화의 발전 속도가 느린 것이다.

세계사 천년의 중심은 정착 농경민이 아니라, 이동하는 유목민이었다 유럽도 발전하게 된 것은 닫힌 사회의 문을 열고 열린 사회로 나아갔기 때문이다. 유럽인들은 말을 탄 것이 아니라, 배를 탔고 자동차와 철도, 비행기를 만들었다는 것이 다를 뿐이다.

그것은 앞으로의 세계도 마찬가지로 폭 넓게 교류하고 세계로 열린 구조를 가진 사회야말로 발전할 수 있는 것이다.

고구려 사람들이 거주한 공간은 열린 공간이었다. 그들은 조선처럼 중화문명이라는 오직 하나의 통로와 연결된 폐쇄된 공간에 살지 않았다. 이점이 고구려를 이해하는 첫번째 단서가 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