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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당신라인 김씨부인 묘지명 전문- 인용

영양대왕 2009. 4. 22. 09:06

너무 앞서나간다는 생각이 든다. 조금 더 생각해보자. 신라 김씨가 흉노 출신이라는 것이 뭐 놀랄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도 신중히 검토할 문제를 너무 쉽게 단정해서는 곤란하겠다. 자. 우선 인용해두고, 천천히 생각해보자.

 

재당신라인 대당고김씨부인묘명 전문

연합뉴스 | 입력 2009.04.22 07:02 | 수정 2009.04.22 07:22

 

(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부산외대 권덕영 교수가 찾아낸 '대당고김씨부인묘명'(大唐故金氏夫人墓銘)은 신라 김씨, 그것도 신라에서 당으로 넘어가 그곳에 정착한 지 4대 가량이나 지난 재당(在唐) 신라인이 여전히 그 가문 뿌리를 흉노에서 찾고자 했음을 보여주는 획기적인 자료다.

권 교수가 번역한 이 묘지명 전체는 다음과 같다.
『전(前) 지계양감(知桂陽監)이자 장사랑(將仕郞)이며 시어사(侍御史)와 내봉공(內供奉)인 이구(李구 < 謬에서 言 대신 王 > )의 부인(夫人)인 경조(京兆.지명) 김씨(金氏) 묘지명(墓誌銘)과 그 서문.

향공진사(鄕貢進士) 최희고(崔希古)가 비문을 짓고 한림대조(翰林待詔) 승봉랑(承奉郞)이자 수건주장사(守建州長史)인 동함(董咸)이 묘지문(誌文)과 전액(篆額.묘지명 제목)을 쓰다.

태상천자(太上天子)께서 나라를 태평하게 하시고 집안을 열어 드러내셨으니 이름하여 소호씨금천(少昊氏金天)이라 하니, 이분이 곧 우리 집안이 성씨를 받게 된 세조(世祖)시다. 그 후에 유파가 갈라지고 갈래가 나뉘어 번창하고 빛나서 온천하에 만연하니 이미 그 수효가 많고도 많도다.

먼 조상 이름은 일제(日제 < 石+單 > )시니 흉노 조정에 몸담고 계시다가 서한(西漢)에 투항하시어 무제(武帝) 아래서 벼슬하셨다. 명예와 절개를 중히 여기니 (황제께서) 그를 발탁해 시중(侍中)과 상시(常侍)에 임명하고 투정후(투 < 禾+宅 > 亭侯)에 봉하시니, 이후 7대에 걸쳐 벼슬함에 눈부신 활약이 있었다. 이로 말미암아 경조군(京兆郡)에 정착하게 되니 이런 일은 사책에 기록되었다. 견주어 그보다 더 클 수 없는 일을 하면 몇 세대 후에 어진 이가 나타난다는 말을 여기서 징험할 수 있다.

한(漢)이 덕을 드러내 보이지 않고 난리가 나서 괴로움을 겪게 되자, 곡식을 싸들고 나라를 떠나 난을 피해 멀리까지 이르렀다. 그러므로 우리 집안은 멀리 떨어진 요동(遼東)에 숨어 살게 되었다.

문선왕(文宣王.공자의 시호)께서 말씀하시기를 "말에는 성실함과 신의가 있어야 하고 행동에는 독실하고 신중함이 있어야 한다"고 했다. 비록 오랑캐 모습을 했으나 그 도(道)를 역시 행하니, 지금 다시 우리 집안은 요동에서 불이 활활 타오르듯 번성했다.

부인의 증조는 이름이 원득(原得)이시니 황실에서 공부상서(工部尙書)에 추증되셨고, 할아버지는 성함이 충의(忠義)시니 한림대조(翰林待詔) 검교좌산기상시(檢校左散騎常侍) 소부감(少府監) 내중상사(內中尙使)라는 벼슬을 지내셨다. 아버지는 성함이 공량(公亮)이시니 한림대조 장작감승(將作監丞) 충내작판관(充內作判官)을 역임하셨다.

조부께서는 문무의 예리함에 여유가 있어 평자(平子.유명한 천문학자)를 궁구하여 관상(觀象)의 규모를 관찰하셨고, 공수자(公輸子.저명한 기술자)를 궁리하여 신과 같은 기술을 갖추셨다. 이에 기예로 천거받아 금문(金門.황실 혹은 조정)에 들어가 여섯 조정을 섬겨 봉록과 직위를 갖고서 처음부터 끝까지 훌륭한 삶을 살다 아름답게 마치셨다.

(이구의) 전 부인은 농서 이씨로 대대로 벼슬한 든든한 집안 출신이다. 그리고 부인은 판관의 둘째 따님으로 유순하고 곧은 마음은 날 때부터 스스로 그러한 품성이었고, 여성으로서의 일솜씨와 부녀자의 도리는 옛날 일로부터 스스로 힘써 부지런히 배운 바다.

이씨 집안에 시집감에 이르러 중외(中外) 친척들이 모두 현명한 부인이라 일컬었다. 그러나 부인에게는 뒤를 이을 자식이 없어 전 부인이 낳은 세 아들을 기르고 훈육하니 친자식보다 더했다. 장차 선행을 쌓아 넉넉한 보답을 받으려고 기약했으나, 어찌 천명(天命)을 일일이 헤아려 길고 짧음의 운명을 정한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연이어 병을 앓아 무당과 편작(扁鵲) 같은 의원도 병을 다스리지 못하다가 함통(咸通) 5년(864) 5월29일 영표(嶺表.지명)에서 돌아가시니 향년 32세다. 단공(端公. 시어사의 별칭으로 여기서는 김씨 부인의 남편)은 지난날의 평생을 추모하여 신체를 그대로 보전하여 산을 넘고 강 건너기를 마치 평평한 땅과 작은 개울 건너듯 하며 어렵고 험함을 피하지 않고 굳은 마음으로 영구(靈柩)를 마주 대하며 마침내 대대로 살던 고향으로 돌아왔다.

맏아들 경현(敬玄)과 둘째 아들 경모(敬謨), 그리고 다음 아들 경원(敬元)은 모두 슬퍼하며 몸과 얼굴이 바짝 여위고, 멀리서 영구를 모시고 따르며 한없이 슬피 울부짖었다.

경현 등이 남은 수명을 겨우 부지하며 삼가 예문을 갖추어 함통 5년 12월7일에 영구를 만년현(萬年縣) 산천현(산 < 삼수변에 産 > 川鄕) 상부촌(上傅村)으로 옮겨 대대의 선영(先塋) 묘역에 안장했다.

부인의 숙부는 한림대조로 앞서 소왕부(昭王傅)를 지냈고 친형은 수우청도솔병병조참군(守右淸道率府兵曹參軍)이니 연이어 나란히 조정에 벼슬하며 가문의 업을 이었다.

나 최희고(崔希古)는 부인의 형과 오랜 친구 사이로 죽은 이의 지난 일을 슬퍼하는 글을 짓고 명문(銘文)을 청하므로 이에 다음과 같이 명(銘)한다.

하늘과 땅이 인자하지 못하여 도균(陶鈞.부모)보다 먼저 돌아가시니, 누가 옳고 누가 그르며 소원함도 없고 친함도 없도다. 쌓은 선행 누리지 못하고 대명(大命)은 영원하지 않으니, 어찌 그 훌륭함이 오직 뛰어난 성인만이겠는가? 이 짧은 세월을 만나 태산에 노닐고 진령(秦嶺)을 건너 다녔도다. 대도(大道)는 오로지 만물의 변화를 좇아 함께 할 뿐이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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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